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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와 가족/가족과 사회

[English][Japanese]

다테이와 신야(立岩 真也) 2010/11/23
장소:한국・서울・중앙대학교사회복지대학원


 이 강연은 생존학창성거점2011가을 기획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입니다. 또한 이내용은 번역어 이며, 번역의 수정은 계속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아동 복지 전공의 대학원생이 많기 때문에 오늘 저의 강의내용은 아이와 가족,가족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최복천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의 강의가 끝나고는 질의응답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때도 많은 논점들이 논의 된다면 좋겠습니다.

■■강의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가족

오늘 수업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아동 복지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자신 특별히 아동에 대해서 연구해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조금 고민을 했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에게는 20살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의 학부모로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포함해 가면서 일본의 현황들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최선생님께서 아동복지전공자들이지만 너무 구애 받지 않고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자유롭게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이 수업에서 한국의 장애학에 대한 수업이 있었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일본의 장애 또는 장애운동 그리고 장애학이라고 하는 것, 부모와 아이 그리고 가족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것들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어떤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지 있는지에 대한 것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사회학을 했던 사람으로서 장애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자는 아니지만 제일의 일부분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들의 사회운동에 함께하고 운동을 연구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25년 전부터 저는 그런 사람들과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애인운동이나 장애에 대한 연구는 25년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연구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70년대의 초반부터 일본에서는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이 전개 됩니다. 저는 대학 재학 시 아마 지금의 여러분들과 같은 나이 때였던 거 같습니다만 그때부터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장애인운동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장애인운동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 대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부터는 장애인 운동에 관계해온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했으며, 1990년대 초반에는 공동저서인『생의 기법』이라고 하는 이름의 책이 출판되게 됩니다. 『생의 기법』이라는 타이틀이며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면「Ars Vivendi」(알스 비벤디)라고 하는 라틴어가 됩니다. 이 책은 오늘 통역을 맡고 있으며 우리대학원의 학생이기도 한 정희경씨가 한국어로 번역해주었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분들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제3장「제도로서의 애정――탈(脫)가족이란」과 제4장 「시설을 나와 살아가다―― 복지의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에서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시설 생활과의 관계,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책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대학 재학 시 처음 만나 알게 되면서 꾸준히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 대부분 나이를 이야기 하자면 20대,30대 정도의 뇌성마비 장애인들 이였으며 젊었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장애를 입게 되어 어렸을 때부터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에게 있어 시설에서의 생활은 어떤 것 이였으며,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전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애인들에게 있어 가족이 없어 육체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도와줄 사람들이 없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물론 가족과 함께 살기는 하지만 학대를 당하고 있거나 집안에 방치 당한 체 살아가는 장애인들이나, 그러한 현실들이 물론 있으며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커다란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은 특히 그런 문제가 있는 가족이라든가 아니면 가족이 없다는 것인가 만을 문제화 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모가 명확히 있고 부모는 착하신 분들이며, 오랫동안 개호를 해주고 보살펴 주신분들 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살핌이나 개호를 부모나 가족들로부터 장애인 당사자들은 20살이나 30살이 넘어서도 계속 받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이러한 도움을 앞으로도 계속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부모들은 좋은 부모이기는 하지만 부모에게 언제까지나 개호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계속 가족과 같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장애인이 아니라면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취직을 하면서, 결혼을 하면서 조금씩 부모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갈 수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당연시 되어 왔습니다. 혹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를 장애인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이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의식적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탈 가족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탈 가족 운동을 해가자 라는 식으로 그들은 의식이 변해 갔으며, 그러한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이 운동은 70년대부터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것은 가족 뿐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즉 아무리 좋은 타인이라고 하더라도, 또는 자신을 옹호해주거나 보호해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인 ‘자기’와 자기를 옹호하고 보호해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은 다르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름에 대해서 먼저 자각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복지학과 장애학과의 관계

이 말은 사실 오늘 과제로 주어진 장애학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복지학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사회복지를 하는 것이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달하는 그런 입장에서 본, 또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실천이며, 그 실천을 위한 학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 필요성이나 의의를 사람들은 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부정할 수는 없으며, 부정할 필요는 더욱 없습니다. 다만 본인과 그 본인을 지켜야 하는 측 즉 당사자의 입장은 어느 쪽이 나쁘다 좋다라는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일단은 다릅니다. 다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 즉 학문하는 입장에서만 봤을 때는 보이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역시 있지 않을 까요? 우리는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생각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장애학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이 조사하고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즉 장애인이 아닌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러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다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으로만,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으로서만,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다루는 것만으로는 장애를 가진 인간, 사람 사람들의 생활만을 이야기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고민하는 곳에서부터 장애학이라고 하는 것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랬을 것이며,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이러한 곳에서 생성되고 존속되고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학은 그런 학문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서, 먼저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뇌성마비라든가 그러한 사람들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주로 뇌성마비 장애인 이였으며, 뇌성마비장애인들은 언어장애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언어장애가 적은 사람 즉 말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시작하고 전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결코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만의 한정된 고민은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 그리고 지적 장애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부모와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시설의 직원이 있어서 안심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본인들 즉 장애인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지적 장애인의 경우라면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들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모델」

  위에서 한 이야기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일단 저의 이야기는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지금부터 입니다.
  지금까지의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어느 쪽의 입장에서 어떤 상황을 볼 것인가 어디서부터 무엇을 출발점으로 해서 상황들을 풀어갈 것인가 그리고 봐가야 할 것인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를 들면 신체장애가 있다면 자신의 신체가 움직이지 못하는 부분, 그 만큼은 누군가가 대신 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염연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장애인의 운동은 그리고 장애학은 또는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그 부분을 간단하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애학에서는 자주 개인모델이라고 하는 것에 사회모델을 대치 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토론 되고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석해야 할 것인가라는 것은 한가지 방법만은 아니면 아주 다양합니다. 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일본어로 쓰여져 있는 것을 영어로 변역해 놓은 것이 있으르로 그곳을 참고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해보면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입니다. 하지만 사회모델은 개인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사회가 일정한 만큼의 지원을 해야 하며, 책임도 사회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해 보면 자신이 번 수익, 자신이 일해서 번 것, 일해서 생산한 것에 대해서는 본래 자신의 것이며 타인에게 주어서는 안된다가 개인모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결과/생산물에 대해서 자신은 받아들일 권리가 있다 그것은 동시에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범위안에서 생활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며, 뭐 책임이랄까 의무랄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장애학 혹은 장애인운동은 그런 생각들이 정답인가 라는 것에 의문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20년, 30년간 그런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보통 사람들 만큼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필요한 것 이라고 하는, 그런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제공할 의무라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존재하며, 사회전체는 그것을 부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모델이 주장하는 핵이며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장애학과 가족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것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위치를 부여해야 할지요. 영국이나 미국의 장애학 중에는 별로 가족들의 이야기가 아마 잘 나오지 않는다고 조금 전에 최교수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진짜 정답은 저자신도 잘 모릅니다. 실제로는 예를 들면 영국은, 고령자의 개호부분은 우리들이 생각한 만큼 사회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개호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높은 비율로 존재하고 있으며, 별로 우리들은 그러한 상황들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적어도 성인이 되면 본인은 가족으로부터 독립해서 생활해 가야 한다고 하는 겉모습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 개인, 사회에 도움이 될만한 적극적인 요소에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개인과 사회가 첫 번째 두 번째라고 했을 때 가족은 세 번째로서 별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각국에서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렇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두 가지(개인, 가족)가 아니라 세가지(개인, 가족, 사회)인 것이지요. 자기의 삶은 자기가 책임지고 스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본인인 개인이 책임을 지지 못하면 가족이 보살펴주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도 어렵다면 사회가 어떤 식으로 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순서이지요. 이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아시아 제국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조나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앞서 말씀 드린 두 번째가 부족하다고 한다면 장애학, 또는 장애인운동의 주장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아질 것입니다. 즉 지금 말씀 드린 먼저 개인이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면 가족이 도와 주어야 하며, 그것도 어려우면 사회가 라는 식의 순서가 정답일까요? 장애인운동은 그것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것이 사람들이 살기 편안한 방법일까? 그것을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는 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생활하기 쉬운 것은 아니며 정답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회에 호소해왔다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주장은 그런 것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신 장애인운동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주장입니다. 즉 사회전체가 부담할 수 있도록 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유지되는것. 그것이 첫 번째로 이루어져 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첫 번째가 되는 것이 아니며 가족도 두 번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첫 번째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이였으며, 주장이여야 했으며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그런 운동이였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을 하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의 의의라든가, 좋은 점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반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며, 오해입니다
  가족은 가족으로서 또는 가족간에 사이가 좋은 사람은 사이가 좋게 계속이여져 가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첫 번째(사회) 이야기에 입각한 것이라면, 함께 산다는 형태이든, 혹은 따로 분리해서 살든, 가족이 서로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활해 가는 것.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 들이 생활할 때 살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제가 말씀 드린 첫번째(사회)의 책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씀 드리면 가족만이 또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 보다도 가족들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됨으로서 생활이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어 짐으로서 가족 사이가 나빠져가고 비참해진다기 보다는 예를 들면 기본적인 개호나 혹은 소득 생활의 보장이라고 하는 것이 잘 정비된 것을 바탕으로 가족들이 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이루어 진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인간관계, 가족관계는 잘 되어 갈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즉 그러한 사회 본연의 자세이며, 가족이든지,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을 소중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연구 혹은 저희 팜플렛의 프로그램이 나와 있듯이 단순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알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적어도 저에게는 기본적인 시점 즉 start point인 셈입니다.

기록하는 것에 대한 의미

 작년 지금과 같은 시기에 정희경씨랑 함께 서울에 살고 있는안효숙씨의 집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동기가 되어 2010년 4월부터 안효숙씨는 저희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안효숙씨의 어머니는 ALS라고 하는 신경난치병 환자로서 두 딸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난치병에 걸리게 되면 또는 난치병의 상태가 진행되어 가면, 24시간 반드시 누군가로 부터 개호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족이 잠도 자지도 못하고 개호한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인당사자는 죽어버린다. 혹은 죽기 전에 스스로 죽을 것을 선택해버린다. 이러한 상황들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최악의 아주 나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이 아닌 다른 시스탬을 만들려고 일본에서는 노력해 왔습니다. 안효숙씨는 이러한 시스템이나 일본의 현황을 배우면서 앞으로 한국에 어떻게 적응시키면 좋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 올 여름에는 이러한 같은 아니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부터 Werdnig-Hoffmann 로 인해 아주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자녀로 둔 부모 조직인「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아이의 부모 모임(바쿠바쿠의 모임)」la이라고 하는 모임으로 올해 여름 저는 그 모임의 20주년 기념대회에서강연을 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 역시 자신의 아이가 소중하기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신의 아이의 개호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라는 식으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사람들 ALS나 Werdnig-Hoffmann 의 아이들 그리고 난치병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를 향해 호소해 갔는가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을까? 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를 말씀 드리자면 30년에서 40년이 걸렸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공적 개호를 보호해야 한다는 운동이 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라고 생각해 보면 40년 정도 경과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40년 동안 운동을 조금씩 강도를 높여 왔습니다. 한편 우리들 즉 연구자들은 장애인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노력과 활동을 잘 기록하고 그들의 주장과 운동이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장애인운동의 테마를 알아가면서 우리들도 또한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서포트를 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것을 생각해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런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통역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해서 한 문장씩 이야기 해서 통역하도록 합니다만 오늘은 저희 대학원생들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늦게 시작했고,통역을 하는 정희경씨가 저의 책을 번역해 주어서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통역을 생각하지 않고 길게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웃음) 정희경씨 죄송합니다.(웃음) 오늘은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질의응답

최복천선생님

  역시 다테이와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많은 주장과 이야기를 해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장애학의 시점이 새로운 시점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해주시는 내용의 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다테이와 선생님의 말씀 중에 자주 들렸던 단어가 장애인 운동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장애학이라고 하는 것이 기존의 즉 지금까지 있었던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장애인복지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단순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누구의 문제인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중요하지 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지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금의 장애인복지는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생존학 센터에서 리서치를 하거나 새로운 자료를 모집하고, 그 활동에 의미를 전달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회서비스를 만들 때는 국민들의 기분이나 국민들의 감정을 잘 들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운동 안에서 장애인운동은 늘 배제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장애인의 운동과 장애학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음을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테이와 선생님의 말씀도 이런 내용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것인가라”는 말씀도 굉장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였다고 생각합니다. 개호라든가 그런 것 만의 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커다란 틀속에 넣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강의였습니다. 또한 오늘 다테이와 선생님의 말씀 중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 즉 문제점도 지적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질문이 있으시면 질문해 주십시요.

대학원생

『생의 기법』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장애인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장애인이 실 생활에서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매뉴얼화 작업등이 생존학 센터의 프로젝트안에 있습니까?

立岩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을지 어쩔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아주 섬세하고 자세한 수단이나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으로 말해보면 예를 들면 테크노로지와 같은 부분도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부분이랄까, 어떤 것을 깊게 조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 조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저희들은 기본적으로는 인문 사회계열 영역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술 개발등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기술을 개발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것을 필요로 하는가 또는 어떠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착각을 하며 뭔가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개발된 것은 대부분 사용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라든가, 아니면 이런 것들이 필요해 라고 말 할 수 있는 중간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중간자적인 역할을 우리 연구자들은 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 과제의 하나라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대답입니다.
또 하나는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좁은 의미로서의 테크노로지 뿐만 아니라, 스타일이랄까 무드랄까? 일본어로 하면[분위기]입니다만 한국어로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요. [유의(流儀)」도 비슷한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방법, 그것은 좁은 의미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여러 신체의 상태가 다르면 그만큼 생활스타일이나 무드 또한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재미 있기도 하며, 적어도 어느 쪽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 하고 있지 안다고도 생각합니다. 테크노로지라고 하기 보다는 프랑스어이며 아트라고 합니다. 그것이 영어로 해석해보면 아트입니다. 그리고 이 아트를 기본으로 하는 만든 것이 arvis 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의 생각들과 고민 연구를 어떻게 하면 어떤 마음자세로 그리고 어떤 식으로 느끼면서 살고 싶은가에 대해서 조사하거나 글을 쓰기도 합니다.

질문

 장애 아동에게 학대가 있을 경우, 강제적으로 분리해서 보호하는 것이나, 국가로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해야 하는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立岩

  사실 지금 받은 질문은 오늘제가 하고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싶었던 세 번째의 이야기 입니다.
  확실히 아이인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우리들은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인 당사자가 말하는 것을 가장 많이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바람직합니다. 다만 문제나 고민들이 그렇게 결정한다고 해서 끝나버릴 것인가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럴리는 없겠지요. 이것은 아동이나 지적 장애인 그리고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도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즉 예를 들면 정신장애를 생각해 봤을 때 자살기획, 자해행위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지금 그(정신장애인) 사람이 자살하고 싶다고 했을 때 자기의 생각이니 하도록 놔두는 것이 바람직 할까요? 아닙니다. 이러한 케이스는 아주 흔한 케이스이며 자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혹은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당사자 본인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본인이 말하는 것에 반대해서라도 황에 맞게 결정하는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리결정이라고 말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장면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할 것인가, 또는 어떤 기준으로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철학적이나 윤리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굉장히 이론적으로 크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 대리결정을 꼭 부모가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특별한 권한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예로 말씀드려 보면 부모이기 때문에 학대해도 좋은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다르다고 저는 생각하며,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일본에서는 아동상담소가 있습니다만, 그러한 곳에서 개입을 하며,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러한 곳의 개입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해와서 이제는 일반화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을 상대로 또는 부모를 상대로 공권력의 개입적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화될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라고나 할까, 재미있는 문제나 아니면 어려운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명백히 부모나 가족이 학대를 해서 공권력이 개입이 되는 식으로 간단히 해결된다면 힘들지는 않을 텐데요.
예를 들면 여러분들은 챨리체프린이 주연했던 영화를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Joseph Frank Keaton이라고 하는 희극작가도 굉장히 재미있다고 호평했던 오래된 챨플린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봤을 것입니다. 챠플린의 영화 내용 뿐만 아니라도 많은 영화등에서 나온 예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생활할 곳이 아니기 때문에 공권력이 개입해서 아이들을 시설에 데리고 들어가버리는 것입니다. 챨리체플린의 영화에서는 체플린이 불량자여서 그런 남자에게 아이를 맏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영화는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은 어딘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불량자라고 하더라도 체플린은 아이랑 잘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체플린은 맘대로 고아 아이와 같이 살고 있는데도 그 상황을 미국의 복지국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차에 아이를 테우워 시설로 가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시청을 하는 우리들은 생각하기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立岩

이 말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딘가에서 공권력의 개입을 막으려고 하는가 동시에 개입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일까, 위험한 것을 느끼거나 먼저 좋지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것은 아동복지라든가, 아이의 문제를 생각했을 때 근본적인 문제 즉 아주 기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렵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운 상황일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 자체라는 것이 학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때는 먼저 예를 들면 부모라면 부모의 입장에서 그것은 단순히 부모로서의 권위를 휘두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좋은 아이로 키울려고 할 것이며, 자라게 할 기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대와 욕망이 지나쳐 강요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겠지요. 문제는 정도에 따른 것입니다. 잘 키울려고 하는 기대와 욕망이 강요를 넘어 학대를 하게 된다면 그 부분은 반드시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 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다른 한편의 예를 들면 국가라면 반드시 국가나 사회의 한 부분에 도움이 될 것인가, 또는 되어야 할 모델상이라는 것이 있어 국가나 사회의 입장에서 본 경우에는 이러한 사람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바르게 자랄 수가 없다라 라든가, 좀더 다른 환경을 만들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이해 즉 이익과 해로운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국가는 국가가 생각하는 이익과 손해, 그러한 이해에 따라 사람의 관계나 환경을 바꾸어 간다는 것이(예를 들면 아이를 시설로 데리고 가버리는 것) 어디까지 좋은가를 생각할 필요도 동시에 우리 연구자들에게는 있습니다.
저는 사화과학의 기본적인 과제의 하나가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 더 추가하면서 저의 답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마, 예를 들면 국가라면 국가의 입장에서 새롭게 좋은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아이를 그 틀에 알맞도록 키울려고 합니다. 물론 부모라든가 가족에게도 아이에게 기대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후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즉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부모나 가족에게서 아이를 강제로 떼어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약간 낙관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아니면 꼭 아니더라도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체플린 영화의 경우 가족처럼 지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가나 주위사람들은 인간관계는 이래야 한다 라든가, 아이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아이를 가까이에 두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의 편에 먼저 공권력은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생

  자페증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자페증. 제가 지금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현장에서 볼런티어를 하고 있습니다. 주로 성인들입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지역에서 잘 생활해 갈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는 곳인 레스파이트(respite)입니다. 또한 그러한 자페증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시설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시설을 지역안에 만들어 00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본에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베에 있는 행복 촌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복 촌이라고 하는 곳이 시설과 어떻게 다릅니까. 그리고 그러한 커뮤니티에 대해서 그러한 공동체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立岩

 오늘 처음에 말씀 드렸던 것으로 말씀을 다시 드리자면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라도 시설이 아니라 지역에서 혼자 살아가는 형태도 있으며, 그룹홈이라고 하는 형태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신체장애인의 경우는
1980년대에 신체장애인들 사이에서 그룹홈이 좋지 않을까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시설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룹홈은 어중간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논쟁을 토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지 일본은 90년대부터 현재까지 운동보다는 정책쪽에서 장애인의 탈시설화를 국가의 정책안에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탈시설화 라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작은 시설이라고나 할까, 일본에서 말하는 그룹홈이라고 하는 것과, 한국에서 지금 말씀하신 것과 같은 형태의 것이 어느 정도 얼마만큼 일본과 비슷하고 어느 정도 다른지 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4명이나 6명의 작은 규모의 그룸홈을 대체안으로 추천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신장애인의 경우 말해보면 지역이행, 지역으로 이행하기 위한 중간시설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역시 제2의 시설과 지역의 중간형태가 추천되고 있는 것도 9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좋은 대체안이 될수 있을지 대체안 것인가에 대해서 일본에서도 논의가 있습니다.
 
  다만 저는 기본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매우 정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늘상은 아닙니다만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결정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러한 상황이 되었을때 “자” 어떠한 거주 생활의 형태가 좋은가에 대한 문제가 조금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중간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만, 그런데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혼자서 생활하도록 해서 얼마나 좋다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곳이 역시 신체장애인의 경우와는 다른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저의 조카가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그 아이는 자페아동입니다. 고기능 자페의 남자 아이로 처음 만났을 때 아..이런 느낌의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봤습니다만 그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지만 그 반대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굉장히 적극적인 곳이 있습니다. 자폐 타입 중에서도 좋고 나쁨을 떠나서 버릇 이라고 할까요. 혼자서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즉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혼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저는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요. 특정 개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개성이나 특성을 염두에 두고 더욱 이주의 형태, 또는 이주에 대한 지원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것을 더욱더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녹취 담당자:長谷川唯
UP:20101201 REV:20100205(기록게재),20110307, 1031
장애학  ◇다테이와 신야(立岩 真也)  ◇Shin'ya Tatei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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