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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운동/장애학 일본・9――여성들

다테이와신야 2010/09/06
[Japanese][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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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말한다

 일본에서 장애를 가진 여성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瀬山紀子의 석사논문「<이야기>와<커뮤니티>의 생성-장애를 자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의 제3장「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와 커뮤니티」가 자세하다. 또한『장애학의 주장』(石川・倉本編[2002])에 수록된 문장으로서는 瀬山「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여성장애인운동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봐주시길 바란다. 또한 일부라도 번역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외는 아래와 같이 급하게 작성한 거 밖에 없다.
  첫번째의 시작으로는、[1][8]에서도 언급했듯이 우생보호법개정에 관련된 운동이 있었다. 여성운동과 출생전진단・선택적낙태에 반대하는 장애인 쪽(적어도 일부는)에서는 대립이 있었던 것 처럼 보였으며, 실제로 그러했다는 의견들도 있다. 하지만 양쪽이 전혀 다른 것을 주장했었냐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았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이나 그러한 여성을 포함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목소리를 내 왔다. 1982년에는[8]에서도 이름이 등장한米津知子(1948~)도 함께 했다. 우생보호법개악방지연락회」(「방지연」、後に「SOSHIREN――여(내)몸이기 때문에」)가 결성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떤 조직에 여성 회원이 있지만 주로 남성회원들이 중심에 있으며, 목소리도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내게 된다. 이러한 모임에서 여성들은 주로 가족이나 육아 그리고 남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발언을 하는 움직임들도 있었다. 이러한 모임으로서는[푸른잔디회]의 부인부(여성부)의 모임, 1974년의 [CP여성의 모임]이 있으며 그 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사회를 향한 움직임으로는 장애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의 자살에 관한 보도(1987년)에 항의 활동하는 것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출판된 책은『여자로서CP로서』(CP여성의 모임 편[1994])이 있다.
  그 책에는 자궁적출에 대한 문장도 수록되어 있다. 장애인의 자궁적출이 논의된 것은 1979년의「휠체어시민전국집회」の「여성장애인문제분과회」가 계기가 되었다. 뇌성마미 여성으로 부터 스스로 자궁을 적출하면「생리에 관한 활동보조를 받지 않아도 되어서 굉장히 인생의 폭이 넓어졌다」라고 말이나「자궁적출은 안전한 형태로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장하길 바란다」라는 발언등이 있었다. 이러한 발언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는 활동보조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법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궁적출을 강요하게 한다고 하는 반론도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므까이가제]라고 하는 그룹이 결성되어 자신들의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2]に소개한 잡지『산들 바람처럼 마을로 나가자』에서 몇 번인가 계속적으로 성에 관한 특집을 실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 이 잡지와도 관련이 있는 책이 2권 출판되었다. 1권은 牧口一二・河野秀忠편★01『러브』(牧口・河野편[1983])、岸田美智子・金満里 편『나는 여자』(岸田・金편[1984], 이 신판이 『신판 나는 여자』(岸田・金편[1995])。
 그리고 1986년에는「DPI여성장애인네트워크」가 발족한다★02。이곳에서도 우생보호법의 문제, 우생수술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SOSHIREN――여(나)의 몸」・「DPI여성장애인 네트워크」등에 의해 먼저 우생보호법의 철폐를 위한 활동이 실시되어[8]이 곳에 서술한 것 처럼 그것은 현실이였다. 그리고 1996년 우생보호법이 모체보호법으로 변경된 후에는「우생수술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모임」―위의 단체는 규모가 큰 단체가 아니였으며, 맴버들도 중복되어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우생수술을 강요 받은 경험을 기록했으며, 그것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활동을 실시했다. 2003년에는 『우생보호법이 범한 죄――아이를 빼앗긴 사람들의 증언』(우생수술에 대한 사회를 요구하는 모임 편[2003])이 출판되어 있다★03。
 명백한 피해/규탄 받아 마땅한 가해가 한쪽에 있다. 그리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좀더 미묘하게 일상적으로 계속하고 있다. 이곳에서 조금 소개한 후의 것에 대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기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5]에서 소개한 것 처럼『섹슈얼리티의 장애학』(倉本 편[2005])등의 몇 권인가 「학술적」인 책도 출판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도 몇 가지의 주제가 논술되어 있다.

사람・책

 여성장애인들이 쓴 책도 몇 권인가 있다. 그런 책에 대한 소개도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생각하고 기대해 본다. 나는 여기서 몇 권의 책과 몇몇 사람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활발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후배들에게도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관련 일을 해온 많은 사람들이 책이나 문장을 발표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2]에서 서술한 것처럼 일본에서는 학술적인 서적이기 보다는 본인들이 자신들의 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대한 소개는 저자들의 나이 순으로 서술해 가겠다. 과거에 내가 다른 곳에 기록했던 부분도 중복되어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짧게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먼저 양해를 구해 두고 싶다.
  ◇1960년대에는 뇌성마비장애인으로 이후에 오키나와에서「흙 집」이라고 하는 민박을 운영하기도 한다. 현재도 운영중이며 홈페이지도 있다. ――木村浩子(1937~)의『발가락으로 살다.』(木村[1966])『나의 반생기』(木村[1967])가 자비로 출판되었다. 「자립생활」이라고 하는 단어는 없었던 시대였다. 그분이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하고 나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木村는 화가이기도 하며, 그 후에도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해 왔다. 1995년에는『오끼나와 흙집 이야기』(木村[1995])가 출판되었다★04。
  ◇本多節子(1936~)는 초등학교 졸업 후에 계속 나가노현에 살았으며, 나가노현의 푸른잔디회에서 활동했고 혼자서 생활해왔다. 자서전으로는 『뇌성마비 지금 혼자 생활한지 30년――여성장애인이 사는 싸움』(本多[2005])등이 있다.
  ◇猪野千代子(1936~1999). 17살 때 고열로 전신마비가 됨. 31살때까지 14년간은 가족으로부터 활동보조를 받고 살았다. 1967년에는 자궁적출수술. 1968에는 뒤에서 서술할 三井등과 함께「후츄료육센터」에 입소. 1973년에는 그곳을 나와 동경도 도립 휠체어용 주택에 입소. 「장애인의 발을 빼앗아 되돌려 주는 모임」대표를 역임, 장애인의 교통권에 관련된 운동을 전개한다. 출판 팜프렛으로『내가 삶의 모양』(장애인의 발을 빼앗아 되찾아 주는 모임・1 지회[1976])『재가중증장애인의 생활—교통과 행정과의 10년의 싸움』(장애인의 발을 빼앗아 주는 모임 [1982]). 또한 『리뷰뉴스 오직 한길만 미니판』에 기록되어 있는「나에게 있어 여자란 무엇인가?—어떤 「신체장애인의」의 수기」(猪野[1973])라고 하는 문장도 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문학자이며 뇌성마비장애인인箙田鶴子(1934…~)の『신에게 고발』(箙田[1977]、1987년도에 문고판이 나왔다).『타인으로의 여행』)이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여성운동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었다. 예를 들면 뒤에서 서술한 아사카(安積)는 箙田의 책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境屋의 책이나 木村의 책에서도 나오기 때문에 충분히 영향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다. ★05。
  ◇三井絹子(1945~)의 저자는『저항의 증거 나는 인형이 아니야』(三井[2006])。三井는 태어난지 6개월만에 고열로 장애인이 된다. 아주 어렸을때는 걸었었는데 후에는 계속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우리들은 약 20년 전인 1987년에 三井씨를 인터뷰조사 한적이 있었다. 그녀는 말이 아닌 문자판을 이용해서 우리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때 우리가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三井俊明씨 였다.★06。
  俊明씨는 絹子씨(결혼전의 성은 新田)와 오랫동안 결혼해서 사는 사람으로 1948년생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美樹씨로 1979년에 태어난 딸이 있다. 이 책의 일면에는 뒤에 서술할 [사회운동]의 부분과 거의 함께 했으며, 2사람의 이야기 이며, 한 가족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두 사람과 그 지원자들은「三井일가」와 잘 지냈으며 구니다찌(国立)시에서 활동도 계속해왔다.  가난,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인 1965년에 町田荘이라고 하는 시설에 입소했지만 쫒겨나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퇴소했고 1968년에 후추료육센터에 입소했다. 그러나 시설의 생활에 참을 수 없게 되면서 몇몇 사람들과 센터에 대한 항의운동을 시작한다. 그 해 그들의 행동에 적극 지지를 해준 직원들의 발령에 반대하면서 데모를 시작한다. 그런 중에 俊明과 만나게 되었다. 1972년에는 시설 이전에 반대하면서 동경 도청앞에서 텐트 농성을 시작한다. 그 농성은 1년9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농성은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다루었다. ★07。 하지만 덴마크의 탈(脫)시설 운동처럼 이야기 하지는 않을것이다. 외국으로부터 전해온 것이 아닌 것을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있었던 것에 대해서 좋고 싫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좋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생의 기법』을 쓰게 되었다.★08。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그들이 주장해온 것을 무시하고 잊어 버린 것 처럼 했을까?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조금 깊이 이야기 해보면 먼저 의료나 복지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2]에서 서술한 것 처럼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이「혁신」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09。
 그러나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꼭 해야 할 말들은 해왔다. 1971년에 「간호부장에게 항의」라는 편지가 있다. 그 편지를 인용한다. (p.101)。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센터의 나쁜 말을 많이 한다고요」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설이라고 불리 우는 그 존재 자체를 밝히고 있는 것 뿐입니다. 꼭 이 곳의 센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국에 있는 시설이 같은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통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왜 요통에 걸리는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을 깊이 파헤치지 않으면 요통은 해결되지 않습니니다. 또한 왜 우리들은 시설이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을 오해해서 나쁜 이야기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N씨는 「친한 사람이라면 남자에게 화장실 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해도 괜찮지 않아? 」라고 말하고 있네요. […]N씨는 남녀를 초월하는 하고 극복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네요. 그렇다면 왜 지금 남자화장실과 여장화장실을 구별해 놓고 있는 것입니까? 」
 
 그 후 센터에 되돌아 가지만 1975년에는 그곳을 나와 東京都国立市에서 俊明씨와 함께 수급자로 살기 시작했다. 같은 해「구니다찌 달팽이의 모임」을 발족하고, 1983에는「달팽이의 집」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하게 되고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자립생활」로의 이행을 지원했다. 1993년에는「라이프스테이션 원스텝 달팽이」를 발족시킨다.
  ◇樋口恵子(1951~). 저서로『엔조이 자립 생활――장애를 최고의 은혜로』 (樋口 [1998]), 『아버지 83세, 치매 상태로부터의 생환』 (樋口 [2004]). 고치(高知)현 아키시(安芸市) 출생. 1963년에 어릴 때의 척추 카리에스(caries)가 재발. 중학교때는 병 때문에 누워서 시설 생활을 경험. 1971년에 대학에 입학. 1974년에 동경도 마치다시(町田市)로 옮기고, 장애인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1986년에 일본에서 최초의 자립 생활 센터 「휴먼케어 협회」 東京都 하치오지시(八王子市))설립에 참가. 1989년에 마치다시(町田市)에서 자립 생활 센터 「마치다(町田) 휴먼 네트워크」 을 창설. 1991년, 전국자립 생활 센터 협의회(JIL) 의 발족에 영향을 주고 1995년에는 대표에게 취임. 1994년 마치다시(町田市) 의회에서 처음의로 여성장애인의원으로 당선. 1995년 베이징 여성회의에서 우생보호법개정을 호소하고, 다음해인 96년에 모체보호법으로의 개정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1년에는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않았다. 아래의 문장은 선거 전날 연설문에서 인용했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장애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 고쳐야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한번 뿐인 인생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니까 당당하고 생기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동료들과 함께 지역생활 시스템을 만들어, 부모나 가족의 보호로부터 나오고 한쪽에서는 시설의 관리로 부터 나와 본인들이 살고 싶은 지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당당한 인간으로 살면서 그런 사회환경을 만들어 내고, 경제활동을 해서 세금을 냅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은 보호나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지금 21세기를 시작한 첫해에 그러한 정책결정 장소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장애가 있는 당사자가 참가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저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특수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라고 하는 분리교육에 반대합니다. 왜 분리교육을 시킬려고 하는 것일까요? 어렸을때 부터 따로 키운다면 장애를 가진 아이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놀고 싸우고 배우면서 서로의 다름과 다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즉 타문화 공생의 기본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베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합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원이 있으며, 그것들을 더욱 충실해 해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

  ◇境屋純子(1952~)。『공중을 나는 트러블 메이커ー――「장애」인이며 사생아인 내가 있어』(境屋[1992]). 이 책에도 태어났을 때부터의 일들이 써 있다. 다카사키시(高崎市) 출생. 뇌성마비장애인. 1960년에 시설에 입소. 양호학교에 입학. 고등학교는 (현재 쯔쿠바대학 부속 桐ヶ丘특수학교. 1973년에 자립 생활을 시작한다. 76년에 와코대학(和光大學)에 입학. 휠체어장애인을 청강생으로 받아들여 화제가 된 메이지학원대학(明治學院大學)은 원서를 받아 주지 않았으며, 와코대학(和光大學)에서 처음으로 받아 주었다. 입학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77년부터 84년까지 3명의 아이를 낳고 88년에 아이의 아버지와 별거했으며 91년에 이혼했고 3번째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安積나 町田市의 堤 愛子 그리고 히구치 게이코등과 함께 동료상담에 관련된 활동을 해왔다. 또 安積와 境屋 는 동경의 구니타치시(國立市)에 있는 자립 생활 센터 「구니다찌 엔조위 센터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때부터 境屋우라라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小山内美智子(1953~). 뇌성마비장애인. 1970년대 후반부터 북해도를 중심으로 활동. 「삿포로 이찌고의 모임」을 발족시켜 이후에 대표를 엮임한다. 저서로 『발가락으로 쓴 스웨덴 일기』(小山内[1981])、『휠체어에서 새벽녘의 커피――장애인의 성』 (小山內) [1995]). 『당신은 나의 손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기분 좋은 활동보조를 받기 위해서』 (小山內) [1997]), 기타.
(金万里) (1953∼). 앞에서 열거한 공동저서외 단독 저서로서 『사는 것의 시작』 (김 [1996]). 오사카 출생으로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4년간 입원 후에 퇴원, 1961년에 시설에 에 입소하여 10년을 보냈다. 1975년에 활동보조를 받으면서 홀로 생활하는「자립 생활」을 시작한다. 1983년에 극단 「態変」을 창단하여 현재도 운영중이다.―― [1]에 게재한 것은 그 극단의 공연 포스터이다. 1985년에 출산. 그의 저서에는 요양시설에 대해 항의하려고 시설에 들어갔으며 그곳을 점거하게 된다. 철사로 자신을 방 책상에 동여 매면서 농성을 하고, 기습해서 들어온 경찰에 연행되지만 데리고 간 곳은 구치소나 경찰서가 아닌 자신들의 사무소였다. 이 사건은 많이 알려졌으면서도 동시에 한심한 것으로서 일부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소개 하기도 했다. (127-132페이지). 그리고 남자이야기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우생보호법, 자궁적출수술 등 큰 사회문제들이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문제화되어 왔고, 스스로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10.
★10。
  ◇橋本미사오(1953~)
  ◇堤愛子(1954~)。
  ◇安積遊歩(1956~)。『생의기법』의 공동저자로 제1장「〈나〉에서 그녀 자신의 30년의 이야기를 기록했다(호적 이름은 아사카 준코이기 때문에 이 책에는 아사카 유호가 아닌 준코로 나와 있다).후쿠시마현(福島県)에서 태어났으며 골형성부전증의 장애인이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1985년에는 東京都의 구디다찌(国立)시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도 살고 있다. 처음으로 단독 출판된 책은『위로 받은 섹시여행――나는 휠체어의 내가 좋아!』(安積[1993])、『휠체어로 부터의 선전포고――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정치적이 된다』(安積[1999])、『생명에 보내는 초 자립론――모든 몸은 백점 만점』(安積[2010])
 「〈나〉에게」의 내용을 보면 부모가 병원에 데리고 다녔으며, 잘 알지 못한체로 수술을 몇 번인가 받았지만 아프기만 했지 좋아 지지 않았다는 것과, 병원 옆에 있는 기숙제 특수학교에 입학하지만 간호사가 너무 엄해서 힘들었다고 하는 것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료나 간호에 대한 좋은 느낌은 없는 듯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수교육]을 포함한 복지관계자들이 좋다고 하는 것도 전혀 아니다. 또한 그것이 전체 중에 일부인 것을 먼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인터뷰조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많이 있었다. (이 부분을 정확히 해두어야 하는 것이 좋다고 서술했지만 『임상사회학의 실천』에 실린「낫는 것에 대해서」)그렇다면 이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의료모델」vs…이라고 하는 이야기와 연결된다.
  단지 그런 내용은 그 책에 있는 내용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사카는 인생이 바뀌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이 몇 곳이 있다. 미국에 6개월 정도 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이지만 그 이전인 1976년 이였던 20세때였다. 그녀는 그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후쿠시마(福島) 푸른 잔디회라고 하는 작은 조직에서 꽃구경대회(花見大会 )때 또 한번 인생을 바꾸게 하는 사람(책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자립생활운동과 장애문화』 (전국자립생활센터 협의회편 [20010501])에「장애인은 살아 가는 것이 일이다」 가 실려 있는 鈴木絹江 이다)이야기가 나온다 (28-30페이지). 이 부분이 나는 재미있었고 많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학생들에게 강의 할 때도 그들의 열정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해왔다.
 그리고 더욱이 20년 후인 1996년에 우주라고 이름 지은 여자아이를 낳는다. 그녀의 딸도 골형성부전증으로 두사람이 모두 골형성부전증인 셈이다. 출산 전후에 대해서는 96년과 97년에 2번 NHK교육 텔레비전에서 반영했기 때문에 보신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1999년에 2번째 단독저서인『휠체어로부터의 선전 포고――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나는 정치적이 된다』에 서술하고 있다.
 그녀 그리고 樋口나 境屋와 함께 잘 알려진「동료상담」을 만들었다고 까지는 말을 못하지만 보급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피어peer란 동료・동년배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어떤 같은 것을 공유하고 공통의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상담해 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동료상담인 것이다. 공통이라는 것은 여성, 학생, 노인, 등 다양하다. 그 중에는 장애인들끼리의 상담도 있다. 安積는 우리들과 만나기 전인 1993년에 6개월 정도 미국에 있었다. 당시 더스킨이라고 하는 회사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일본 장애인들이 미국에 연수를 가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금도 있으며 현재는 미국이외에도 더 많은 나라들로 확대해서 진행하고 있다. ★11。그녀는 미국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물론 동료들끼리 이야기를 하거나 들어주는 것, 그리고 서로 도아주는 것은 이미 일본에서도 계속 해왔던 것이지만, 일정하게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이념이나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처음이였다. 그녀는 1986년에 설립된 자립생활센터 東京都 하찌오지시(八王子市)의 「휴먼케어협회」라고 하는 (처음에는 굉장히 작았다)조직에서 동료상담 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일을 시작했다. (자립생활센터에 대해서는『생의기법』의 제9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좁은 의미의 상담이지는 않지만 그런 이념을 사용한 「자립생활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제6장) 이 상담은 본인에게 맞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온도차이가 있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부분에 관한 책은 서점에서도 살 수 있는 安積遊歩・野上温子編『동료상담이라고 하는 이름의 전략』(安積・野上 편[1999])★12。
 ◇津野田真理子(1957~)。『마리코 색에 물들어――장애인 여성이 마을에서 살아 갈때』(津野田[1983])
。津野田는 동경 사람으로 뇌성마비장애인이다. 책은 잡지『이야기 특집』에 개제된 문장을 모은 것이다. 그녀는 어떤 특정 단체에서 활동해온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쓴 글들이 많이 있다. 앞으로 몇 가지 그러한 책들을 소개해 가고자 한다. ★13。

*번역:정희경 (鄭喜慶)
UP:20100914
다테이와 신야(立岩 真也)  ◇Shin'ya Tateiwa  ◇장애인(의 운동/역사)를 위한 자료・사람  ◇장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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