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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운동/장애학 일본・2――사람들

다테이와신야 2010
[Japanese][Chinese][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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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들(당사자들)

[1]에서 소개를 하기 시작한 장애인들의 운동은 학교에는 다니지 않았던 (장애를 이유로 학교에 갈 수 없었다)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푸른 잔디회」의 중심적인 멤버이며 「전국장애인 해방운동 연락회의(전장연)」의 설립에도 영향을 끼쳤다 요코즈카 고이치(橫塚晃一) (1935∼1978)은 중학교 2년밖에 다니지 않았고, 젊어서 암으로 사망한 요코즈카(橫塚) 후에도 가나가와(神奈川)에서 활동을 계속한다 요코타히로시(橫田弘) (1933∼)은 무학이였다. 1980년대 부터 1990년대에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중요한 활동을 했던 다카하시 오사므(高橋修) (1948∼1999)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독학으로 공부를 했고, 학교는 있지만 학교에 가지 못했던 (갈 수 없는) 시기가 일본에도 오랫동안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그 후에 적지않게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을 별도로 한다면―― 그 마지막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01.   지금도 많지 않지만 당시 특히 중증의 장애인들 중에는 일반학교에 다니고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은 굉장히 적었다. 그러한 상황들을 봤을때 일본의 상황은 미국의 자립생활운동이라고 불리웠던 것이 캘리포니아주립 대학 버클리교에 있었던 것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한국에서는 대학에 진학한 폴리오의 (중증의 뇌성마비인들과 비교하면 경증) 장애인들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당시의 학생운동들로 부터 운동방법을 배워 본인들의 운동을 시작하고, 전개했다 ★02 그런 한국과도 일본은 달랐다.
그리고 그외것과 비교했을때,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물론 사람들 마다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많이 나타났다.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하반신마비인 거 빼고는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주로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도 그랬다. --다만 이시기부터 몇가지가 조금씩 다른 것이 있었다.-- 행동하고 발언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장애가 경한사람과 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처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 중증이면 타인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곳에서 운동이 생겨났을 것이다. 학생이나 노동자중에는 장애인을 지원하는 활동보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 사람들은 장애인운동의 지원자 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 특별한 일이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최중증이며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많은 장애인들은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장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부분은 지원을 받음으로서 [할수 있는]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굉장히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최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의견들이 나왔다. 미국이나 유럽에 연수나 운동관련 행사에 참가하고 온 사람들은 그곳에서 뇌성마비장애인을 보지 못했다, 일본은 때론 아주 심한 언어장애를 동반한 뇌성마비장애인이 운동을 주도해왔는데 말이랴라고 다녀온 감상을 이야기 하는 일본 장애인들이 자주 있었다. 거기에는 스스로 장애가 심한사람이 활동을 하고, 또는 중증사람들과 같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최중증인 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들이 중증과 경증의 분리를 피해옸다고 하는 자부심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거나, 책을 낸 사람들도 있다. 이책은 [학문적]인 책이 아니였으며, 자신의 생활등을 기록한 책이다. 어느 나라이든 장애인이나 환자와 관련된 논픽션이나 자서전 같은 책은 많이 출판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로 저명인이 아닌 장애인이나 장애인운동을 해온 장애인자신들이 한 출판으로서 그 의의를 인정하고 지원을 해온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도 중요한 잡지가 2개의 창간되었다.★04。
そよ風のように街に出よう創刊準備号      そよ風79号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스스로의 독립성을 가질려고 했으며 그와 동시에[1]에서 서술한 것 처럼, 당시의 사회운동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구체적으로 사회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이 중증의 장애인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 당시의 사회운동은 적어도 그 [겉모습]은 [혁명]이라고 이야기 하며 [체제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운동은 결국 좌절로 끝났다. 결국 운동은 점점 쇠퇴했고, 많은 사람들은 예를 들면 대학생이라면 취직하고 [일상]으로 되돌아 간다. 다만 운동을 계속하면서 아니면 그곳에서 일탈한 후에 일반 직장에 취직을 않거나 취직했으면서도, 장애인의 생활이나 장애인의 사회운동을 지원해온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들중에는 그러한 위치즉 가까운 곳에서 장애인을 지지하고 지원해온 사람들이 있다. 다만 그 중에는 학문이나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을 단념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05。

좌익에 의한 투쟁

  이렇게 사회운동에서 일탈한 사람들이 중증의 장애인들을 지원해왔다고 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운동자체가 장애인들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장애에 관련된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좌익 운동의 역사는 각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에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당이 좌익중에 가장 큰 세력이었지만 공산당도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는 있었다. 그러한 이유들은 이곳에서는 생략하지만,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1960년부터였다. 이들의 정당, 특히 혁명의 정통 주체라고 칭해 온 공산당을 비판하는 세력이 「신좌익」이라고 칭하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얻게 된다. 신좌익은 1960년대 중반 사회운동이 정체되고 있었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자기의 운동 즉 사회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동시에 이시대 운동의 특징은 특정한 당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정치적 신조도 다양했으며, 그런 신조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공투」(「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의 약자)의 운동은 이러한 무당파「non+sect(radical)」의 사람들것이라고 했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다. 무당파인 사람들과 다양한 당파의 사람들이 뒤섞여서 복잡한 양상을 보였으며, 특히 공산당•대•그외 당파 라고 하는 대립관계의 도식은 확실히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공산당 자체가 작은 세력이였으며, 였기 때문에―― 작은 대립이긴 했지만 당시를 생각했을대는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공투/신좌익제당파는 그 투쟁이나 분쟁을 일으킨 측이며 그것을 확대해간 측이기도 하다. 한편 공산당이나 그곳과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학생조직은 대학개혁, 교육개혁을 주장하면서, 대학의 입학시험이 중지되는등 혼란스러운 상태를 [정상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주도권 싸움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엇을 가지고 투쟁 했던 것일까?. 여기에서는 세계정세의 인식이나 운동의 전략의 차이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 말 할 수 있는 것은 대학이나 학문은 당시 지금보다 [혁신]에 가까웠던 부분에 대해서는 잠깐 뒤로 밀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현재는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마르크스 경제학」은 당시 「근대경제학」과 양립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공산당이나 그런 운동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의, 복지나 의료나 (특수)교육계와의 연결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상당히 강했다. 학교의 교원이나 복지시설 직원등,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부정에 대한 분개, 「약자」에 대한 공감으로 그런 직장을 선택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다음으로 그 비용을 공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다. 따라서 정권과 가까운 정당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정부의 지출이 적은 것에 대한, 즉 정부의 시책이 불충분한 것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어. 그들은 노동조합운동과 관계를 만들어 혁신정당과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일부는 공산당이 이 영역에 주력하기도 했으며, 공산당계의 조직이기도 했다. 또한 장애인 부모들의 운동이 장애인의 요구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존재하는 시기, 부모들 조직도 또한 이 조직과 관계를 맺었다. 사회 보장•사회복지관계의 학문•교육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06.
이상을 확인한 뒤에 당시의 운동에 대해서 설명을 더 하도록 하겠다. 물론 당시 운동의 커다란 테마는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것이었지만, 같은 시기, 미나마타병 (Minamata Disease) 등의 공해문제가 사회문제화 되었던 시기이다. 공해의 고발, 공해나 약해 (의 은폐)에 과학자들이 가담하고 있음을 비판했고, 그것은 과학기술 전체에 대한 회의•비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의료•장애를 둘러싸고는 정신의료가 특히 문제화 되었다. 1950년대 북유럽(北歐)•북미등에서는 지적장애인 그리고 정신장애인의 거대시설에 수용하는 것을 비판하게 된다.―― 이것은 「노멀라이제이션」의 운동이라고 하게 된다 (간단한 해설로서 다테이와(立岩) [2002a]). 이 운동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거대시설이 계속적으로 건립되었으며, 장애인의 수용 격리가 진행되었으며, 복지적으로 성숙된 몇몇 국가들은 시설건립에 대해서 반성•비판을 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정신병원이 비교적 일찍부터 만들어졌지만, 다른 장애인시설의 건립은 그 보다 늦었으며 비판의 대상이 널리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이다. 시설 정비는 확실히 표면적으로는 시설상태의 개선이다라고 되어 있었지만 비판의 움직임은 당초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초반에 정신병원의 현실상태를 고발하는 르포르타주(reportage)가 나타났으며, 시설 수용과 그 시설에서의 장애인이나 환자에 대한 취급이 문제가 된다 ★07. 1974년에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조직이 결성된다 ★08.
 그리고 1970년대 전반 정신의학이나 심리 카운셀링과 같은 영역에서, 일본 임상심리학회 (……)이나 일본 정신신경학회 (The Japanese Society of Psychiatry and Neurology→영어페이지 )라고 하는 학회의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것들의 학회. 학회라기 보다는 한 때에 그중에서 일정한 발언력을 가진 부분이 1970년대 이후, 그때까지 본인들의 소행을 반성하려고 했다. ★09.
 그리고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반드시 보수적인 세력만은 아니였다. 오히려 사회를 위한 기술•의료, 사회복지의 확대를 추구했던 세력이며, 그 세력에 대한 비판은, 공산당이나 그 계열 조직 그리고 관계를 하고 있었던 연구자들에게 대한 비판이었다. 대학투쟁의 시작의 하나가 도쿄대학(東京大學) 의학부이었던 것은 상징적이다. 학생의 처분이 발단이었던 운동에서도, 이 대립의 구도가 존재했다. 비판받고 그 비판에 반론한 것은 그 후 1980년대 초에는 미국의 「자립 생활 운동」등을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교원이나 연구자이기도 했다..
 과학기술이 다양한 부분에 폐해를 초래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악용이며 그것을 고쳐야 하며, 고쳐야 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또한 비판받은 쪽은 생각한다. 비판자들은 (인민을 위해) 과학을 긍정하고, 그리고 그 과학을 짊어지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긍정하는 기존의 좌익과 다르며, 자기들은 과학기술의 문제성을 더욱 근본으로부터 문제를 삼는 것이다. 「고친다」는 것, 「발달」 (한다 / 시킨다)는 것,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게 되는 것)」에 다시 되물어봐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것에 대해, 비판받은 쪽은 의료•재활에 대한 전면부정이며, 폭론이다라고 반박하게 된다. 이것들의 논의가 정확히 맞물려 있었던 것인가?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전문직이면서 자기의 전문성을 회의하고, 부정하자고 하는 것은 왠지 자학적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자기의 일을 계속한다. 게다가, 그 주장•운동은 결국 의료자 중심이였다고 하며, 그러한 부분도 있었다.
정치적 대립이 대부분 그랬던 것 처럼, 이 대립에는 소모된 부분이 많이 있었다. 단지 이러한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서 생각한 방법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곳까지 주장되었으며, 그것이 생각해야 할 것으로서 제출된 것의 의의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10.
[1]에서 간단하게 소개한 장애인 운동과, 이상에서 소개한 사람들 사이의 연대•공동투쟁의 관계도 생긴다. 정신의료•심리요법의 학회에서, 정신장애분야에서 본인들의 참가와 발언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거기에서 몇사람인가가 정신장애의 본인 참가가 실행되도록 노력했다. 학회대회나 학회지에서 정신장애 본인들 몇몇사람인가가 발언하고 문장(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속에서, 「양호(특수교육)의무화」을 외쳤던 시기에도 공산당 등은―― 오랫동안 정권정당이었던 자유민주당과 함께―― 찬성했다. 그것은 「전면발달」을 말하고, 늘릴 수 있는 것은 늘리자,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에 적합한 교육 환경이 필요해서 특수교육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격리다 라고 했다. 할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모두가 함께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좋기 때문에 그러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대학의 학생운동에서 정당과 정당을 싫어하는 것이 관계하고 있었던 시기, 특수학교•학급이 아니라 보통 학교•학급에 한 아이를 입학시키려고하는 운동을 지원하는 운동이, 대학 자치회 운동의 큰 과제로 여겨진것은 이러한 이유에도 관계하고 있다. 공산당이 젊은 사람 대상의 조직인 민주청년연맹(민청)과 그 조직과 대립하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주도권 싸움이 있어, 그것이 쟁점의 하나가 되었다.★11.
.  이 싸움은 소모적인 싸움이였지만, 동시에 주장•사상을 「순화」해 가는 것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후자 측은, 「할 수 없어서 좋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가능했는가? 또 말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이러한 과제는 남겨졌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이 운동에는 무엇인가 학문의 확립과 제도화를 초래할 일은 없었다.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람들의 어떤 부분은 지원자라고 하기 보다는, 운동의 전면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음에서 다음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하는것만으로 시간이 지나 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장애 당사자들에 의해서 씌어진 많은 문장은 어떤 학문적인 체계를 가진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책들이 운동하면서 주장되었거나 의문시 되었던 것이 「학문」적인 검토•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몇편인가의 서적을 내놓기도 했다 ★12
우리들 세대(1960년생)는 이러한 움직임들 보다 10년부터 20년정도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의 운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모른다. 씌여진 문장이나 이야기를 통해서만 안다. 그리고 그후인 1980년대 이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몇가지 정도 알고 있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은 사회운동에 직접 관련되어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학생때에는 보통학교/학급으로 입학할 수 있도록 운동했던 취학운동이라고 하는 것을알고 있는 사람, 잠깐 그곳에서 활동한 사람도 있으며, 특히 아무 관련성이 없는 사람도 있다. 특히 [학문적]인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러한 연결로 인해서 서로를 알게 되거나 고민해왔던 것이다. [활동보조」를 했던 사람도 있다. 또는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 읽거나 듣거나 집회에 참가해서 조직이나 사람을 알게 된 사람도 있다.★13. 그러한 사람들과 일본 장애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나는, 장애인운동 중에 표출된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구를 해왔으며, 또한 생각할 만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14. 그것에 대해서도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하겠다.

■주 [영어판에서는 생략] ○가 있는 사람은 문헌표에 게제 끝

★01 八木下浩一 1941~ 1967년(당시26세)지역의 초등학교에서 취학운동을 시작했고, 1970년에 埼玉県川口市立芝 초등학교에 입학。『마을(지역)에서 살다――어떤 뇌성마비 장애인의 반평생』(八木下[1980]○)。→주11
  전국결성대회의 사진(오사카인권박물관의 HP)http://www.liberty.or.jp/exhibition/A%20document%20introduction/A%20handicapped%20person.html
  http://www008.upp.so-net.ne.jp/aiz/000honta-back-top_002.html
★02 한국 장애인운동에 대한 일본어 논문으로는정희경English)의 논문 정[2010]○
★03 新田勲(1940~ 『발로 쓰는 글이 외친다!――전신성장애인 목숨의 보장을』(新田[2009]○)
  여성들。本多節子(1936년생、초등학교졸、『뇌성마비、지금 혼자서 생활한지30년――여성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투장』(本多[2005]○)、三井絹子(1945年生、三井[2006]○)、樋口恵子(1951년생)、境屋純子(1952년생、境屋[1992]○)、金満理(1953년생、金[1996]○)、堤愛子(1954년생)、安積遊歩(純子、1956년생、安積[1993]○[1999]○[2010]○)등이 있다.
  境屋:1952년 高崎市태어남。뇌성마비로。1960년에 시설에 입소、 특수학교에 입학. 고등학교는 (현재 쯔쿠바대학부속)桐ヶ丘특수학교。1973년…
★04 『산들바람처럼 마을로 나가자』(리본사)、『계간복지노동』(現代書館)。
  河野 秀忠(리본사、『산들바람처럼 마을로 나가자』를 간행)。cf.http://www.puku-2.com/maneko/doc/149.htm
★05 그후에 어쩌다가 다르게 왔지만, 1970년대 오사카의 지원자들과 장애인과의 관계/집필을 한 것으로 山下幸子[2008]○。定藤[2010]○에서도 기술하고 있다.
★06 「전국장애인문제연구회(전장연)」。「장전협」。
「[…]일본 공산당과 같은 정당과의 연결끈으로, 학자들이나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기 보다는 학교의 교직원이나 복지시설의 직원등과의 관계는 있었으며, 그러한 사람들의 전국규모의 조직으로서 「전국장애인문제연구회(전장연)」이 있었다. 단지 그 집단과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장애인들)과의 사이가 나빴다. 오히려 그 집단과 사상을 비판하는 것에 지나치게 노동력을 할애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좌익」내부의 대립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대학의 학생운동에서 정당과 정당을 싫어하는 학생들이 관련되어 있던 시기, 특수학교•학급이 아니라 보통 학교•학급에 한 아이가 입학하려고 했던 운동을 지원하는 운동이 대학의 자치회 운동의 큰 과제로 여겨진 것은 이러한 이유로도 관계하고 있다. 」 (다테이와(立岩) [2007]0)
金井康治 의 취학 투쟁. 『2000일• 그리고 이제부터―― 특수학교에서 일반학교로』 (金井 투쟁 기록 편집 위원회편 [1987]○). 1999년9월11일 30세로 서거. 「뇌성 마비의 장애아로 태어났지만, 8세의 때 특수학교에서 일반 학교의 아다치(足立)구립 하나바타히가시(花畑東) 초등학교로 전학을 원했고, 자주등교(自主登校)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장애아가 일반 학교에서 배울 것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아사히신문』의 부고란)
★07 오쿠마(大熊) 가즈오(一夫) . 1973. 『르포(reportage)•정신병동』 (오쿠마(大熊) [1973]0)
. 『르포터지(reportage)•정신병동』 (오쿠마(大熊) [1985]○). 『정신병원의 이야기―― 이 나라에 태어난거것의 불행•1』 (오쿠마(大熊) [1987]○).   →다테이와(立岩) 신야(眞也) 2002/05/25 「大熊一夫의 본」 (의료와 사회 북 가이드•16), 『간호 교육』 2002-050
「1970년의 전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움직임의 시작으로 부터 약 십년동안의 일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완전히 모른다. 나는 1960년 에 태어나고, 시골에서 초등학교/중학교/고교를 다니고 있었다. 사도섬(佐渡島)에 태어나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사회 전반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지 기분이라고 할지에 대해서는 그나름대로 전해 들었기 때문에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은 「사회과학」적인 지식에서 한것은 아니였다. 사회학등이라고 하는 학문이 있는 것도 몰랐고,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적도 없었다.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고민보다는 관리자체가 싫다는 기분이 있었으며, 뭔지 모를 사회적인 느낌은 오히려 음악으로 위로 받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학투쟁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겨우 그 정도이었다. 동경대학•야스다(安田) 강당에 숨어 있는 학생에게 기동대가 들어와 잡아 갔던 일을 실제로 본 적도 없다. 단지 사회전반의 흐름이 고등학교에 영향을 미쳤고, 교복을 착용하지 않은 고등학교가 내가 살고 있는 니가타현의 현내(縣內)에도 있다 (니가타(新潟)고교)라는 사실을 어느 신문에서 읽고,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는 터무니 없이 형편없는 교사도 있어 곤란한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루한 곳이기도 하다. 자유로운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들이 음악이 좋다라는 것으로 연결된 것이다.
읽는 책은 대부분 소설이었다. 다만, 大熊一夫의 『르포(reportage)•정신병동』은 중학생의 때에 읽었다. 조사해보니 이책은 1973년에 나온것이였다. 내가 읽었을때는 출간된지 얼마 않된거 같았다. 시골의 마을회관 도서실 선반에 있었던 것을 읽었기 때문에 그 책이 나온지 얼마 안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아차리지 않았다. 이 책은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기사였다. 우리집은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판매점 주인이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구독했기 때문에 아사히 신문을 읽을 기회는 전혀 없었으며, 그 글이 연재되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건 너무 심해! 어쳐구니 없는 일이다고도 생각했다. 기분이 나쁜 느낌이 계속 남았다. 그것만을 말하자면 그것 뿐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조사해보면, 영화『カッコーの巣の上で-뻐꾸기 둥지 위에서』가 1975년에 상영되었다.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어떤 이야기 인지는 책을 읽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나마타(미나마타병이 생긴 지역)에서 깃발을 세우고 온 사람들의 영상은 보고, 계속 여운이 남아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라고 한 소설도 읽기도 했다. 일본의 전시하의 억압등을 포함해서, 원래부터 나는 비교적 단순하게 육체에 더해지는 고통에 대해서 약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거나, 되어 버린것에 대한 무거움이나 힘겨움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반체제」의 운동에 공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아사마(淺間) 산장사건」은 산장에 경찰이 투입되는 것을 실황중계로 텔레비전에서 봤다. 나는 충격을 받을 만큼 사상적으로 충만한 사람은 아니였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였다. 사람은 하려고 할때는 해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그 사건을 보고 특별하게 느낀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立岩 [] 『산들바람』 「新潟」는 「長岡」와 다름)
★081974년에 제1회 「전국정신장애인교류 집회」가 도쿄(東京)에서 개최된다. 그 자리에서 전국 「정신병」자 집단 이 결성된다. 결의: 「보안처분신설반대, 정신외과를 금지해라, 전기 쇼크요법(shock therapy)에 대한 환자에게 거부권을 주어라, 자유입원을 확대해라, 오늘날의 정신위생법체제에 반대하고, 우생보호법에서 보여지는 정신장애인차별에 반대하는 통신•면회의 자유권을 승인해라」등.
★09 학회개혁에 대해서, 阿部[2010]○
★10 「1970년대부터는 적어도 1980년대까지에 대해서, 이 나라(일본)에 대해서는 「좌익」의 내부? 에서 대립의 계기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다. 上田의 저서에는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곳이 있다.
「여기에서 약간 구문에 속하지만, 10몇년 전의 학원분쟁 시대때 자주 학원을 풍미한 「노동력수리공장론」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싶다. 이것은 학원분쟁이 의학부에서 시작되기도 해서, 의학•의료의 근원적인 비판으로서, 당시의 「신좌익」 논객들이 전개한 논의이며, 재활계의 일부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이다. 그것 의료는 전부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재활은 특히, 다만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서, 상처받은 노동력을 수리해서 사용하도록 했고, 다시 자본가에 의해 착취되기 때문에 사회로 내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권력의 가담이며, 범죄적이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지금 들으면 마치 거짓말과 같은 유치한 논의이지만, 당시는 젊은 의학생, 재활관계 직종의 학생 마음을 적지 않게 뒤흔들 수 있는 것이였다. 당시 나는 이것에 대해서, 소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다시 재록해 두고 싶다. 」 (上田 [1983:38]0)
그 「소논문」은 上田 [1971]○ (그 소개는 HP→「上田敏」). 하는 김에 아래부분을 인용해 둔다.
 의사는 환자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 만으로 좋은 것인가? 환자는 공해라든가 노동자 재해라는 것으로 벌레 먹게 될 지도 모른다. 그 환자를 치료하고, 다시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원래의 사회로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의사라는 존재는 완전히 자본 주의의 모순을 은폐하고, 비뚤어진 부분을 짊어져서 본질을 숨기는 역할을 짊어지고 있는 것 뿐만 아닐까?
그러면 의사가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하는가 하면, 그러한 형태로서 문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른바 부정의 부정으로서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의사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동적인 의사가 되는 것을 거부해서 투쟁을 계속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결과적으로 의사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사가 되든 안되든 좋다. 그렇지만 투쟁은 그야 말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 투쟁은 의료의 분야에서 였다. 그 투쟁에서 내가 빠지면 누가 할 것인가? 자기들이야 말로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딱 달라 붙어있는 운동 형태가, 어떻게 과격할 것인가, 그것은 혁명적 패배주의에서 옥쇄주의로 빠져 나온 운동인 것은 자명한 것이다. 」 (最首[1969:101-102]0)
「이계(理系)투쟁위원회는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그것이 평화 때문이든 전쟁 때문이든, 모든 자본가의 재산 즉 사유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은 일면, 노동자 인민을 억압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인민이 자기를 포함한 사회의 모순을 해명하는 무기가 되는 양날의 칼이다라고 말하는, 소위 「과학의 2면성론」은, 과학자가 발명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심하게 공격한다. 」(最首[1969:102])
 『미스즈』에서의 연재(立岩 [2008-2010]0)에서는 臺弘(台弘, 1913∼)의 「나는 변화하는 대립적 의견 속에서 확실하게 절충 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내가 말하는 절충이란 어느쪽도 괜찮습니다고 말하는 것 같은 애매한 태도가 아니다. 」 (臺 [1972:263])라고 하는 문언을 주워 보았다. 또한 臺의 오래전부터 臺와 (또 부서가 다르다고 해서) 上田와 같은 도쿄대학(東京大學) 의학부•부속 병원에 있었다―― 그리고 역시 양심적이고 혁신적인 당사자운동을 이해하고 그 운동에 적극 협력한 연구자이며 실천가이었다―― 秋元波留夫(1906∼2007)에 대해서는 별로 그곳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누군가가 대신 조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여전히 上田가 구성을 담당하고, 上田가 질문하는 사람이 된 인터뷰내용이 첫머리에 게재되고 있는 秋元 99세 때에, 그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99세 정신과 의사의 도전――호기심과 정의감』 (秋元)/上田) [2005]0가 있다. 」 (立岩[2010])
자서전으로『누가 바람을 보았는가――어떤 정신과의의 생애』(台[1993]○)。」(立岩[])
★11 「관계하고 있는」의 계속. 「한쪽의 주장은, 「전면발달」을 말하고, 늘릴수 있는 것은 늘리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교육환경이 있으면 좋은 것으로서 특수교육을 긍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은 격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모두 함께할 장소가 있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럴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싸움은 소모적인 싸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주장•사상을―― 그 좋고 나쁨은 이번에는 별도로 하더라도―― 「순화」해 가는 것을 촉진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후자의 쪽은 「할 수 없어서 좋아」라고 단언하려고도 하는 것이다. 」 (立岩 [2007]0)
  필자(立岩)가 그후에 어떻게 고민하면서 그들의 운동을 생각해왔는지에 대해서는 立岩[2010/08/16]○에 몇가지 기록하게 되었다.
★12 지원자, 연구자…
 石川憲彦 1946∼. 정신과 의사. 『치료라고 하는 환상――장애의 치료에서 보이는 것』 (石川 [1988]0)기타.  最首悟) 1936∼.   『星子가 있다―― 단어없이 말을 걸어오는 중복장애인 딸과의 20년』 (最首[1998]0)
山下恒男 『반발들론――억압의 인간학으로부터의 해방』 (山下 [1977]0), 『지능신화』 (山下편 [1980]0)기타.
篠原睦治 『「장애아의 교육권」사상비판――관계의 창조인가, 발달의 보장인가』 篠原 [1986]0)
초등학교 교원: 北村小夜 .
  「그리고 당사자들이나 조직•운동에 관련된 연구자들 외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학회와 같은 조직에는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여러가지 계기들로 부터, 장애인운동에 대해서 글을 써 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뒤에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오히려 많을 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사람은 연구자라고 하는 직함을 가지고 어떤 문장을 쓰는 것이, 더욱 연구를 하는 것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의 교사, 회사원, 노동조합의 직원, 지방 공공단체 직원, 저작업, 그외의 사람들이 있고, 대학의 교원은 그 일부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대학에 그러한 「연구」의 발판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다. 대학의 교원을 하고 글을 사람들로서는山下恒男石毛えい子篠原睦治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最首悟도 오랫동안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의사로는山田真石川憲彦がいたし、毛利子来도 관련된 것이 있다. 특수학급의 교원을 오랫동안 일해왔다北村小夜가 있다.古川清治은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등
 […] 이러한 사람들 중에은 학문으로서는 철학•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어떤 영역의 학문의 전문가로서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으며, 생각하면서도 그 사람들을 지원하는 지원자이기보다는 운동의 전면에 있지 않으면 않되는 사람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흘러간 사람도 있다. 다만 이것은 그곳에서 주장하거나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을「학문」적인 검토•고찰의 대상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立岩 [20070331]0)
★13 「나(1960년생)의 세대는, 이러한 움직임들 보다 10년에서 20년정도 늦었기 때문에 당시의 운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모른다. 씌여진 문장이나 이야기를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리고 그후인 1980년대 이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몇가지 정도 알고 있기고 했으며, 몇몇사람들은 사회운동에 직접 관련되어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大橋由香子斉藤有紀子玉井真理子柘植あづみ松原洋子라고 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열거한 「저지연(阻止連)」→「SOSHIREN」라고 하는 모임에 직접 관련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주체적으로 관련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모임이나 그 맴버의 관계가 있기도 했다. 또한小松美彦土屋貴志市野川容孝라고 하는 사람들도, 글을 쓰기 전에는 아니면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 사람이나 사람들의 움직임・주장을 알게 되었다. 森岡[2001]라고 하는 저작도 그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였다. 앞에서 서술한 윗 세대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을 받아들였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있어, 때론 그것들에 대해서 써왔다.(예를 들면山下恒男의 논에 대한 언급으로서 立岩[1997:442]○)。
 연구자로서 생명윤리 문제를 장애인의 주장•운동과의 관계에서 적어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알면서 논하는 것은, 일본에서 비교해 봤을때 다른 것 보다는 많이 진행되어 온 것은 아니다. 몇가지만을 단편적으로 기록해온 「운동」이 있어, 그것을 받거나 그것에 관련성을 가지면서 써온 글이기도 하며, 그것에는 그 나름대로 축적된 것이 있다. 그것들을 모두 일괄적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그 평가는 개개인이 해야 할 것이지만, 생명윤리에 관한 연구, 문장전체의 수 자체가 많지 않은 중에 그러한 곳에서 쓰여진 것은 그 나름대로의 비율을 차지하고는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몇가지는 집필을 분담해서 책을 출간하거나 단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전혀 무시당했을 정도도 아니다. 물론 몇 권정도는 그 나름대로 알려지기도 했다.」(立岩[20070331]○)
★14 그 중에서도吉田おさみ가 기록으로 남긴 저서(吉田[1981]○[1983]○)는 중요하다. 阿部[2009]○가 몇가지 정도를 참고 로 하고 있다.

■문헌→별도 페이지

*번역:정희경 (鄭喜慶)
UP:20100812 REV:20100819,20100910
立岩 真也  ◇Shin'ya Tateiwa  ◇장애인(의 운동/사)를 위한 자료・사람  ◇장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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