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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운동//학문 일본・1――시작

다테이와 신야 2010/08/11
[Japanese][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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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면서

Exploring Disability (2nd Edition)』表紙  올 9월에콜린•반즈씨와아리슨•쉘든씨일본을 방문하여 리츠메이칸 대학 대학원에서집중 강의를 할 예정이다.또 장애학회의 東京大學•코마바(駒場) 캠퍼스에서 강연을 한다. 그때 사용되는 교과서가Exploring Disability (2nd Edition)(Barnes & Mercer[2010]、초판은Barnes, Shakespeare & Mercer[1999=2004])로,기에는 일본의 장애인운동이나 「장애학」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이유는 우리들이 세계각국에 있는 잡지나 논문등에 투고를 하지 않았으며, 해외로의 발신을 소홀히 해 왔기 때문이다.
『生の技法――家と施設を出て暮らす障害者の社会学』表紙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일본의 장애인운동과 장애에 영향을 끼쳤왔던 담론이나 학문에 대해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미 『생의 기법――』 (아사카(安積) 외[1990], 증보 개정 판은 [1995])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한국어판 에서는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읽으실 수 있으신 분들은 읽을 실 수 있다.) 이 책을 쓸 당시 일본에는 장애학이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후에 이책은 장애학영역에서 초기에 출판된 책으로서 소개를 하고 있다. 그 책에 내가 쓴 장의 하나가 「빨리 •천천히―― 자립 생활 운동의 생성과 전개」 (다테이와(立岩) [1990→1995])는 장애인운동과 정책의 역사에 관한 장이다. 그렇다면 아주 자세한 부분, 일본인들에게만 의미있는 부분이 많이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을 대폭 생략하고 또 약간은 보충을 해 가면서 일본의 운동에 대해서 소개한다.

■시작

 일본의 근대 특히 제2차 세계대전후 장애인을 둘러싼 정책과 실천은, 먼저 직업적인 갱생(rehabilitation)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자립이라고 하는 말은 경제적인 자활의 의미로만 이용할 수 있어, 그것을 촉진시키는 시책이 중요한 부분으로 그 위치가 부여된다. 또 이 시기에 설립된 시설의 대부분도 그러한 목적과 적어도 이러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으로 수용 시설의 확충 정책이 정비되었다. 그것은 장애인이 가정에서 생활 할 수 없는 어려움에 대한 전제과 문제의 해결로서 준비되어지 것이다. 그리고, 갱생 시설로서 설립된 시설도, 대부분의 경우, 직업적인 독립생활이 곤란한 사람의 수용 시설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업적 자립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어도, 신체적•지적인 기능을 회복•발달시키기 위한, 의료적이고•교육적인 개입이 실시되었다. 게다가, 이시책의 대상이 됮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법령이 규정하는 한도에서 중증장애인에게 생활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어느정도의 연금이 지급되어, 60년대 후반부터 약간의 원호책을 강구되었던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많은 장애인들을 가족에 대한 의존을 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속아래 장애인 운동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을 촉진시키고 부족을 보충하는 것에 그 목표가 있었다. 우선 직업에 갖기 위한 훈련의 요구와 고용의 확보의 운동, 그 다음으로 특히 부모들 입장에서 했던 수용 시설의 확충 운동이 있다. 이것 역시 그 만큼 유효한 시책이 없어 가정에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모의 사망후를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치료•재활•교육을 요구하는 운동도 실시되었다. 그리고, 생활의 보장, 특히 연금제도의 창설을 향한 그리고 창설 이후의 대상 및 지급액의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이것들은 장애인과 그 가족의 최저 생활의 보장의 요구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상황아래 우선은 그것밖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설정된 시스템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부모의 운동이 주가 되고 있었던 것 만으로, 본인의 의향은 억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흐름―― 그것은 곧 바로 없어진 것이 아니다―― 속에서, 1970년경 그것과 다른 성격을 가진 운동이 시작된다. 그 전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 뇌성마비자 단체인 「푸른 잔디회」 의 주장•운동이다.
이 모임은 운동체라기 보다는 상호의 친목을 위한 집단의 성격이 강한 조직으로 1957년에 탄생했다. 그러나, 이 모임 회원의 대부분이 문장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던 시기도 있었으며, 그 모임의 성격이 파탄 친목을 꾀한다고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여기에는 스스로가 처한 사회적인 위치를 반문하는 지향이 비교적 초기부터 였으며, 1962년에는 장애인들만의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후생성(현재의 후생 노동성)과 교섭을 하게 된다. 연금의 증액•거주 장소의 확보는 초기부터 과제가 되었고, 교섭의 주제가 되었다. 그것과 함께, 조기발견•조기 치료의 추진, 수용 수산시설•종신수용 시설의 설립이 주요한 요구 항목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 모임 후의 주장을 보면 주목받는다.
이 회원 중에는 1964년부터 1969년에 「마하라바촌」―― 「마하라바」는 산스크리트어로서 큰 외침」을 의미한다――에서 생활한 사람들이였으며 가장 많았을 때는 20명 정도였다. 그것은 大佛空(오사라기 아끼라)가, 자택을 뇌성마비자의 생활공간으로 제공한, 장소, 그곳에서 형성된 공동체(commune)였다. 그들은, 부모로 부터의 송금과, 오사라기의 수입, 그리고 생활보호, 모금에 의해, 생활을 했다. 최저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한 중증장애인들은 오사라기와 그의 아내로 부터 개호를 받고 있었다. 오사라기는 그곳에서 자주 강의를 했다고 한다. 장애인 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생산성에 의해 사회가 편성되고 있는 이상, 그 사회에 동화하려고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을 촉진시켰다. 그것은 특히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단지,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정토진종(浄土真宗)의 사상을 거기에서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종파의 시조인 신란(親鸞)에 「악인정기(悪人正機)」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보통적으로는 좋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그 좋음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가치의 반전을 촉진했다. 그 영향을 푸른 잔디회의 「강령」에 찾아낼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일본이 새로운 장애인운동의 사상의 뿌리를 종교에 찾아내는 것은 난폭한 것이기는 하다. 단지, 사회에서 좋다라고 여겨진 것은 것을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다고 하는 감각은, 이 사회에서는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후의 장애인운동 사상과 얼마간의 친화성을 가지게 된것처럼도 생각된다. . (장애인들의 극단 「극단態変」이 이공동체를 소재로 한 연극 「마하라바전설」의 공연을 2009년에 했다. 오른쪽의 그림이 그 포스터이다 ★01.

  그 공동체의 붕괴후, 도쿄도(東京都)의 주변지역인 가나가와현(神奈川縣)으로 와서 살게 된 사람들이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푸른 잔디 활동에 참가한다. 그 조직은 아주 작은 조직이였지만, 1970년 두살된 뇌성마비 아이가 그 엄마로 부터 살해당한 사건이 생기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해서 그 지역이 조직이나 장애아의 부모모임에서는 감형탄원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푸른잔디회의 사람들은 비판운동을 전개한다.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어, 71년3월에는 NHK텔레비전 『현대의 영상』으로 소개되었다 (「하나의 CP자 집단」).
종래의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부모가 장애 아이를 부양해야 하고, 개호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나, 시설 부족이 비난받아, 결국 부모는 사회로 부터 동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과 이러한 목소리가 1960년대 일본에서 장애인수용시설의 확충을 재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장애인자신의 존재가 긍정되지 않고 있는 상황, 더욱이 죽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는 그들의 입장이 정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말의 문제성을 가지고 부모도 결국은 그들을 그들 자신의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시작

그리고 같은 시기인 1970년, 도쿄(東京)에서는 장애인시설에서의 처우•관리를 비판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아주 큰 방에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서 칸막이만 있는 곳에 수용되어, 기상은 아침 6시 (5시15분에 전등이 켜진다), 소등은 밤 9시. 화장실의 시간도 정해져 있고 그 뒤에 화장실에 간다 (데리고 간다) 수고를 줄이기 위해서 아침에는 전원에게 변기기 갖다 댄다. 면회는 1개월에 한 번. 외출•외박은 허가제이고, 그 횟수 또한 회수가 제한되었다. 소지품,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었고, 하루종일 파자마만을 입혔다. 씻는데도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머리는 길 수가 없었다. 남성직원에 여성을 목욕시키고도 있었다. 더욱이 시설 개설 당초에는, 입소당시에는 사망했을 경우 해부 승낙서를 쓰는 것이 조건이 되었다. 이 시설 안에서는 침, 종이접기, 노래부르기, 체조하기, 일주일에 3번 산보하는 시간이 있다. 이러한 생활에 대해서 항의운동이 입소자들 일부와 지원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운동은 복잡한 경위를 걸쳤지만, 그 안에서는 시설에서의 생활 개선이 일정하게 진행되었으며, 시설을 나가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움직임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02.
 이렇게 해서 가족에게 보호된 존재로서의 장애인상을 부정하고, 가족과는 다른 이해•주장을 가지는 존재인 것을 제시하고, 가족에 의한 보호와 간병으로부터 벗어나서 생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또한 시설을 나가서 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생활이 「자립 생활(independent living)」이라고 하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다. 이 때는 미국의 자립생활운동은 아직 일본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이 재활 전문가들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는 것은 1980년 전후이다. 일본에서도 사회복지학•재활학에서는 원래 일본에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운동이 있었던 것을 기록한 것은 적었다. 때론 장애인운동 속에도 자립 생활 운동이 미국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우리들이 책이나 논문을 써 온 것도, 하나로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 후술한다 )

■확산

1972년 뒤에 『유키유키테, 신군(神軍)』 (1987년, 베를린 영화제【카리가리】영화상)등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작가로 알려진 原一雄의 최초의 작품 『사요나라CP』가 푸른 잔디회와 공동으로 제작되었다. 정좌자세로 혼잡한 곳을 기여서 지나간다 橫田弘 (요코다 히로시) (대담집으로 橫田 [2004]), 橫塚晃一(요코쯔가 코이찌로) (저서로서 橫塚 [1975], 증보판이 [1981], 신판이 橫塚 [2007])은, 보여지는 존재가 되어온 스스로에 대해서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하는 그 모습이 촬영되어, 비추어졌다. 原는 인터뷰로 다음과 같이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시 미국에서 「블랙•【이즈】•뷰티풀」이라고 하는, 차별받고 있는 흑인이라고 하는 육체야 말로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고방식이 제시되었습니다. 같은 것 처럼 「장애라고 하는 육체야말로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장애라는 육체는 무엇일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걸까. 라고 」 ★03
 
 横塚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주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이해″을 내보이고 ″신체장애인도 같은 인간이다″라고 말하지요. ……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 최대의 생활환경은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가더라도 따라 다니는 것이지요. 」 ★04

이 영화의 상영 운동이 전국각지에서 있었고, 그 상영회에서는 토론회도 열렸다. ★05.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 활동은―― 물론 얼마 안된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73년에는 제일1회 전국대표자대회를 개최, 전국조직으로서의 모양을 갖출 수 있다.
 이상에서는 푸른 잔디회에 대해서 많이 기록했지만 이 조직과 직접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 대해서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두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반체제운동이다. 일본에서는 대학이 그 주요한 장소가 되었고, 그것은 「대학투쟁」이라든가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의―― 종래의 당이나 당파(sects)의 조직과 는 달랐다―― 조직의 이름을 써서 「전공동투쟁 운동」등이라고 불렸다. 당시, 고등교육을 받는 중증장애인은 대부분 없었으며,, 미국의 자립생활운동의 생성 장면과 달랐으며, 장애를 가진 학생이 운동의 주체가 될수는 없었다. 단지 그 운동을 지원한 사람들 중에는 당시의 사회 운동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 혹은 거기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그 운동 자체가 권위에 대해 반항해도 좋다고 하는 「반역유리(造反有理)」라는 분위기로 인해 더욱 왕성해진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原가 앞서의 발언에 이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도, 이 영화의 배경에서는 역시 당시 시대로 부터의 영향이 있었던 샘이지요.寺山修司의 저서인 『글을 버리고, 마을로 나오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에게는 신선하고 자극적이였습니다. 물론 전공동투쟁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전공투쟁 운동안에서 우리가 배운것이 무었이였냐면, 이미 있었던 단어나 생각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으로 배운것을 신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기존에 있었던 것들을 전부 의심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부수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들이 그동안 장애인들과 관계해오고, 활동해온 것들과 딱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서 서술한 것 처럼 하나로서 이나라에 저류로서 존재해온 현세―― 그것은 반드시 라도 별세상•내세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발상이 하나이며, 그리고 또한, 이 사회가 일정하게 발전을 해온 후에 드러난 근대에 대한 회의가 있다. 이 이후, 사람들을 그리고 가장 장애인을 억압하는 것을 총칭하는, 「능력주의(ablism)」 또는 「우생사상(eugenic thought)」이라고 하는 단어―― 이것들의 영어가 의미하는 것과 다르며, 보다 넓은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다――가 사용된다. 이 것에 대해서도 후술한다.
 1973년5월 장애를 이유로 인공 임신 중절을 허용하는 조항을 포함하는 우생보호법(Eugenics Protction Law)변경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푸른 잔디회 외 장애인 단체가 반대 운동을 일으킨다. 또 우생보호법변경이 일단 보류된 후에는, 각지에서 실시하려고 했던 출생전진단(양수검사)등 장애인의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여러가지 움직임에 대한 반대 운동이 행해진다.
  또, 75년에 예정되 있었던 후생성에 의한 장애인의 전국실태조사가, 우생사상에 의한 장애인의 말살로 이어지고, 시설 수용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비판되고 방지된다. 또, 양호학교의무화를 보통 학교로 부터 격리라고 보면서, 그것에 반대하는 운동(75년이후)이 일어난다. 79년에 의무화는 실시되지만, 그 후도 각지역에서 보통학교•보통 학급에 취학을 요구하는 운동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먼저―― 이후 되풀이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여기에서 이용해보면――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로서」 이 사회에 있다고 하는 인식, 사회가 그렇게 편성된다고 하는 인식이다. 그리고 이 때 비판되는 것은, 정치나 자본이라고 하는 것 만도 아니다. 「일반사회」에 사는 사람이 면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가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부정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 애정이라고 하는 규범은 그 것을 감추고, 가족이라고 하는 범위에 그들을 가둔다. 그 가족들과 있는 것이 불가능할 때, 그들을 위해서 준비되는 것도 또한, 사실은 부담을 회피하고, 그들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아닐까? 해결을 꾀하는 것은 타협에 통해, 스스로 해야 할은 문제제기에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여기에서 놓쳐서는 않되는 것은, 외부에 대한 고발로 발단된 이 운동이, 그대로 장애인 자신의 자기규정의 변경을 재촉하게 된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토의되었을 때, 그들 자신도 「죽는 쪽이 낫다」라고 하는 자기의 부정으로 연결되는 되기도 한다.  이 운동은 비장애인을 고발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관념을 떼어 내려고 하는 것, 그리고 각지역의 장애인자신들에게 자기자신을 긍정하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긍정에 대한 호소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미묘한 차이를 떼어내려고 하는 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단지, 가장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장소에 있는 한, 그것을 숨겨버릴려고 하는 단어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곳은 아니였다. 자기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불필요한 존재인 것을 자각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자기자신을 긍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각적이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존재인 것에 대해, 적어도 그러한 작용에 미치게 하는 「쪽」이 있다는 것을 공격하고, 하지만 동시에 연대를 요구해 간다 ★05

■註

★01 강연안내http://artnpo.exblog.jp/9565257/。 이 극단을 주재하는 것은 소아마비인김만리(金満里)(1953~)。저서로 김[1996]、공동편찬에岸田・金[1984]、그 신판으로서는[1995]。
★02 그 시설에 들어가, 항의운동을 하고, 그곳을 나와서 살다三井絹子(1945~)의 저서(三井[2006])가 간행되었다.
★03 http://www.puku-2.com/maneko/tokushu/tokushu8_1.htm
★04 이 기록은 横塚晃一의 저서(横塚[1975][1981][2007])에 수록된 것이다.
★04 高杉[1972]소개되어 있는 단어立岩[1998]에서도 인용했다.
★05 푸른 잔디회의 「강령」 (1970년→영어판 )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 항목은 나중에 추가되었다).
「1, 우리들은 스스로가 뇌성마비자인 것을 자각한다.
우리들은 현대사회에서 『원래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여겨지면서 스스로 위치를 인식하고, 그곳에 운동의 원점을 두지 않으면 않된다고 믿고, 동시에 행동한다.
1, 우리들은 강렬하게 자기주장을 한다.
우리들이 뇌성마비자인 것을 자각했을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자기자신을 지키기 위한 의지이다. 우리들은 강렬한 자기주장이야말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또한, 행동한다.
一、우리들은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우리들은 사랑과 정의가 가지는 에고이즘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생기는 인간응시(人間凝視)에 따르는 상호이해야 말로 진정한 복지라고 믿고, 또한 행동한다.
一、우리들은 비장애인문명을 부정한다.
 우리들은 비장애인이 만들어낸 현대문명이 우리들 뇌성마비자를 따돌리는 것에 의해서만 성립되어 온 것을 인식하고, 운동 및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들 독자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현대문명의 고발에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또한, 행동한다.
一、우리들은 문제해결의 길을 선태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쉬운 문제의 해결을 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타협의 출발인지 몸으로 체험해왔다.. 우리들은 차례 차례 문제제기를 하는 것만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운동이다라고 믿고, 또한, 행동한다. 」


■문헌→다른 페이지에서


*번역:정희경 (鄭喜慶)
UP:20100811 REV:20100910
立岩 真也  ◇Shin'ya Tatei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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