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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긍정되어야 한다

다떼이와 신야 (立岩眞也) 일본 릿츠메이칸(立命館)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교수 2009/11/02
安楽死問題韓日国際セミナー 於:韓国・ソウル市・国会議員会館
[Japanese] / [English]

--translated by 鄭 喜慶 (chong hee kyong)

존엄사의 법제화 논의에 대해서

‘연명장치’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나쁜 의미의 단어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튜브의 관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하고 인공호흡기를 착용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인간답지가 않다’는 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를 착용하는 것은 영양공급을 하기 위한 방법이자 호흡을 보조해 주는 것이다. 몸의 기능 중에서 몇 가지만이라도 감각이 살아있다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기도 하며 호흡이 곤란해졌을 때 고통을 느낀다. ‘연명장치’는–정중하게 잘 표현하자면-그런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은 의식불명의 상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본인은 어떨까. 일단 의식이 없어지면 본인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이 있을 때 정확하게 의사표시를 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 리빙웰의 생각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의식불명의 상태가 그 사람에게 매우 힘든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건강할 때의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또한 의식불명이 된 상태에서는 본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타인에게 의사표현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건강했을 때 했던 말들을 ‘본인의 의사’라고 대부분 판단하여 그대로 진행해 버리게 된다.
 존엄사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병으로 인해서 신체에 고통이 있을 때 원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일본의 의료는 환자의 고통을 완화해 주는 것에 서툴지만 어떻게든 시도해 본다면 고통은 완화될 수 있다.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서 존엄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의식이 없어지게 되면 그 상태가 본인에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가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의식불명인 당사자 본인도 빨리 죽고 싶어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제한하거나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만 주고 효과가 없는 처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효과는 보이지 않는데 심장에 강한 전기쇼크를 계속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중단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단은 현재의 일본 법률의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회복에 효과가 없는 것과 살아가는 데 효과가 없는 것은 다르다.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치료를 중단하게 된다면 병이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찌될 것인가? 회복시키지 못하더라도 생명/생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처치를 부정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실제로 천연성 의식장애 즉 식물상태에서 회복하는 사람도 있다. 뇌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논의가 일고 있지 않은가. 존엄사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원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죽여야 한다고 인정버리는 것이다.
그밖에 연명을 거부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은 매우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을 주위사람들이 그대로 받아 들여 버린다면 “우리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죽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필자로서는, 당사자들이 결정한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소한 사회적 측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취급해서 ‘그 사람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는 이유로 죽어가는 것을 ‘자기결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그냥 “자, 죽으세요” 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존엄사에 찬성하는 사람 대부분조차도 의료와 복지에 드는 돈에 대한 부담이 죽음을 결정하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좋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은 순서가 잘못되었다. 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나 환경을 잘 만들어 놓은 다음에 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좋은 죽음](다테이와 신야, 筑摩書房、2009)에 수록된 것입니다.

초보적인 것 몇 가지

‘종말기’라는 단어는 여명이 어느 정도 남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서둘 필요는 없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면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고 지켜 주면 된다. 일본의 의료는 사실 고통을 완화해 주는 데 서툰데,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하지만 여명이 짧지 않고 길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은 진짜 종말기가 아니고 별도의 상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식물상태라고 일컬어지는 천연성 의식장애의 상태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밖에서 보는 우리가 알기란 너무 어렵다. 상태가 다양하고 변화도 있으며 심지어는 회복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뇌사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미묘한 상태를 존엄하거나 또는 본인의 의사라는 이유로 깨끗하게 정리해 버려서는 안 된다.
의식이 없다면 본인은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전혀 못 느낄 수도 있고 아주 미세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상태가 좋아지는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본인에게 있어 나쁘지는 않다.
 한편 의식이 있다면 어떨까?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상태가 힘들거나 비참하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숨쉬기가 힘들면 몸도 힘들 것이고 기운도 없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눈앞이 캄캄해진다. 자발적인 호흡이 점점 어려워지는 근위축성 측색경화증(루게릭, ALS)에 걸린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 보면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나서 많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의식불명 되기 전에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사느니 죽어도 좋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죽어도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본인이 의식불명의 처지에 놓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으로 하는 결정이다. 본인의 일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에게 결정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실제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만약에 의식불명이 되었는데 건강했을 때 했던 생각과 달리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면 그 사실을 전해 주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고 잠만 자는 경우도 있다.
 왜 잘 알지 못하면서, 그것도 그때 본인의 상태가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결정해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보기에 흉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부담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명이라는 말이 ‘기계에 의지한 채 단순하게 목숨을 잇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여지고 있지만 기계를 이용해서 삶을 연장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움직일 수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면 되며,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건강한 상태에서는 가족이나 주위사람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 때문에 빨리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한 결정을 주위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좋을까?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일단은 못하게 막는다. 그런데 왜 종말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정을 위한 정보를 제공만 할 뿐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가족이나 주위사람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까 빨리 죽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런 논리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했을 때 이야기했던 본인의 의사는 본인의 의사 그대로 잘 받아 준 다음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환자 가족들 중에는 간단하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 사정들이 있다. 실제로 진짜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와 사정들을 해결해 주면 되는 것이다. 즉 간병비와 병원 비용을 가족들에게 부담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존엄사는 경제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어디까지나 본인의 희망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 존중과 사회의 중립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살아있도록 해 주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돈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좌우되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환자가 할 수 있는 기능들을 대신 해 줄 도구들이 있고 그 환자를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소자녀/고령화로 노인을 부양하는 사람이 적어진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이 사회가 죽을 때까지의 몇일, 몇개월, 몇년을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받지 못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 이 글은 [희망에 대해서](다테이와 신야, 青土社, 2006)에 수록된 것입니다.


그냥 살아 있는 것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하나 확신하는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연구를 해 왔다. 바로 아름답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만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루게릭(ALS,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이라고 하는 병이 있다. 전신의 근육이 점점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병이다. 병에 대한 해석은 진행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고칠 수 있는 병은 아니다. 일본 전국에 천 명 정도의 환자가 있다고 한다. 이 진행되면 그들은 스스로 호흡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인공호흡기를 통해서 숨을 쉬고 살아간다. 그러나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 않고 죽어 가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병이라고 여기는 의사들의 망설임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채 고립되어 가기도 한다.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는 환자나 관계자들이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루게릭협회라는 조직이 발족되었다. 이 협회의 발족에 힘을 쏟았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1994년에 53세로 세상을 떠난 가와구찌(川口武久) 씨다. 필자는 [현대사상] (青土社)이라는 잡지에 루게릭병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연재를 하였다. 가와구찌(川口) 씨에 대해서도 연재한 적이 있다.
가와구찌 씨는 루게릭환자로서는 진행이 늦었으며 발병하고 나서 호흡기를 착용하지 않고 21년간 가족과 떨어져 병원에서 생활했고 마지막에는 급성호흡부전으로 사망했다. 가와구찌 씨는 생전에 4권의 책을 썼다. (가와구찌[1983][1985][1989][1993]〕
그는 본인이 입원해 있던 병원을 ‘호스피스’라고 생각했고 ‘인공적인 연명’을 거부하였으며 ‘자연스러운 죽음’을 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까지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의 생각대로 실천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지금 가와구찌 씨처럼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일본사회에 퍼져 갔다. 또한 어떠한 죽음이라도 본인이 결정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쓴 책들을 읽다 보면 그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먼저 그는 의료의 혜택을 받았으며 음식도 보통사람들처럼 먹을 수 없었다. 이것 또한 인공적인 연명이 아닌지에 대해 고 가와구찌 씨는 스스로에게 자문했으며, 확실하게 자신은 인공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살고 있다고 인정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긍정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신체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한, 아니 전달할 수 없게 되더라도 살고 싶다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말한 것에 모순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의 저서 4권 중에 1권은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책 속의 주인공은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잃은 긴급상태에서 가족들의 요구로 호흡기를 착용했고 의식을 회복한 후에는 스스로가 호흡기 착용을 긍정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가와구찌 씨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었다면 그는 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가와구찌 씨는 소설 속의 주인공과는 달리 처음부터 했던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가와구찌 씨는 호흡곤란으로 인한 고통이 늘 자신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무척 힘들어 했다. 점점 몸의 기능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간병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병원을 자신이 죽을 때까지 거주하는 장소로만 선택했기 때문에 좀 더 오래 살기 위한 연명처치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을 받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유서가 된 문장이 남겨져 있지만 거기에는 호흡기 착용 거부 의사를 반복해서 밝히면서 “나의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이 이상 호흡기를 착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없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려고 한 노력가였으며, 그런 시대와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활동을 해 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일과 상관지을 때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며, 점점 더 깊이 자기를 부정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의 고민과 망설임에 대해서는 글로 남겼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깨끗하게 ‘본인의 결정’이라고 여기고, 그 결정대로 사태가 진행되어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주위사람들은 ‘본인의 결정’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들 주위에서 아주 많이 일어나고 있다.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는 반대의 상태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주위에 부담을 주는 짓을 너는 하지 말라는 식이 된다. 주위 사람은 타자를 배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담으로부터 도망가 편안해지려고 한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배신해 버리는 것이다.
 희생을 하는 것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희생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며, 희생의 가치 자체를 배신하는 일이다. 그리고 희생이 되도록 가르치는 쪽은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형편이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든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무엇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일까.
특히 ‘존엄한 죽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논의하는 자체가 확실하게 이야기하자면 불필요한 가치이다. 존엄을 지켜 준다면서 ‘그냥 연명하고 있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왠지 가치가 높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우선,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물론 신체의 고통을 참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통은 의료 행위자의 수준이 낮지만 않다면 아주 많이 경감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체적 혹은 지적으로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없게 되고 할 수 있는 정도도 줄어들기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게 만들자거나 혹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것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즉 가능한 것은 살아가기 위한 도구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적어졌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존재의 도구에 의해서 존재가 규정되고 부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한 사람의 주위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어 현실적인 것에 맞춰지고 있으며, 또한 그 사람 자신의 결정이라는 이유로 진행되고 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실제로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살 수가 없거나 살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 즉 살아갈 수단을 자력으로 만들어 낼 수 없을 때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이 살아갈 가치를 부정한다. 이 두 가지 다 존재를 위한 도구에 의해서 존재가 지배되는 경우이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도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소자녀/고령화로 사람들의 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리 심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러기 위한 도구를 각 개인에게 준비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잘 분배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된다.
 존엄의 문제가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존엄이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서 거기에 사태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신형 바이러스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세계의 다른 어디에선가는 하루에 약 8천명의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어 가고 있다. 특히 남부 아프리카에 많은데, 그것은 불가피하며 비극은 아니다. 싸게 공급하려고만 한다면 공급할 수 있는 약을 사용해서 죽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약을 싸게 공급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싸게 공급하지 않는 것 자체가 비극인 것이다.
 이것들과 비교해 보면 자기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 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결국 본인의 선택 때문에 조금씩 굴절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통사고사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자살 배경에는 실업이나 사업의 도산,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런 배경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이 이 사회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에도 위험이 없고 비참함이 없는 곳은 없겠지만,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 비참한 일이다.
 어떠한 삶의 방법이 좋은지는 잘 모른다. 다만 생명이 그냥 긍정된다면 그것만으로 좋겠다. 우리는 생명을 소멸시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서 확인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원래 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희망에 대해서](다테이와 신야, 青土社、2006)에 수록된 것입니다.



UP:20091114 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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