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20150820
*목차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특별한 것인가?
■「종말기」가 아니다
■어떤 도구인가?
■선택해서 결정하는 것인가?
■호흡기를 다는 것과 떼는 것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정한다?
■저항이 아닌, 영합이 되어버린다.
■필요한 것은 필요하다고 명확하게 구분하다
■가족이 보다 중요한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타인을 활용하는 것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제도를 사용할 수 있다
■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인공호흡기는 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 인가.
숨 쉬기 힘들어지면 고통스럽다. 고통스럽게 된 내가, 만약 말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말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진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또는 말이 통한다면 '그렇게 하지요' 라고 말할 것이다.
기본은 그런 것이 아닐까. 앞에 붙는 단어가 '물에 빠지거나' 혹은 '떡이 목에 걸려'라 해도 좋고, '병이 진행되어'라도 좋다. 그런 것, 아닐까.
물론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복잡한 것이 있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실제 호흡기를 단 사람도 있다. 그것은 본인이 결정하였다라던가,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이야기되곤 한다. 조금 생각 해보자.
그것을 짧게 쓰면 다음과 같다. 더욱 자세하고 길게 몇 군데의 책에 쓴 것이 있으므로 읽어 주시면 좋겠다(주 ★ 01). 또한 여기에 쓴 것을 비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간략하게 많이 생략해서 적었으므로, 보다 상세하게 서술한 것을 읽고, 그리고 비판해 주면 좋겠다.
■특별한 것인가?
우선 인공호흡기를 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으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라면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이 걸려 있는 이상, 호흡이 괴로운 것은 매우 싫은 이상, 착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힘들지 않은 쪽이 좋기는 좋다. 어떨까.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공호흡기는 '안경'과 같은 것이라고, 혹은 '귀걸이'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단지 도구다, 장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말이 맞다고 말하는 사람과 탐탁치 않아 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어느 쪽도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인공호흡기는 어느 정도의 기계인가.
호흡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처럼 공기를 받아 들여, 공기 중의 산소를 골라 혈액에 보내 혈액 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여 다시 공기 중에 배출하는 과정이다. 분명히 그것은 대단히 복잡한 과정이다. 근육의 힘이 작아져 필요한 공기의 출입이 어려워져 있다. 인공호흡기는 그 공기의 출입 부분 만을 보충한다. 다른 역할은 역시 폐가 담당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 호흡기는 '환풍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02. 분명 "ventilator"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respirator'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인 것 같지만, 자세한 것은 나로서는 모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런 도구 · 기계는 많이 있다. 안경은 단순한 '렌즈(눈의 렌즈를 대신 하는 렌즈)’이다, 등등.
그리고 게다가 우리는 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공투석기가 그렇다. 그것은 신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대행하고 있다. 혈액을 여과하고 있으니까 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리고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복잡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더 간단한 것을 하고 있다고 해도, 또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해도, 그렇게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사용하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공호흡기는 중요한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간단한 기계에 속한다.
우리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스스로 조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덕분에' '자기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 여러 가지 덕분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좋은 것이라고도 여겨지고 있다. 인공 호흡기를 사용하여 살아 가는 것도 그 일부이다. ★ 03.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스스로 노력도 하고 있다. 호흡기의 움직임에 자신의 공기의 출입을 맞추는 등 나름대로의 또는 상당한 노력을 하고 괴로워도 하고 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 같은 것은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호흡기 사용자는, 기계를 사용하고 있을 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등등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종말기」가 아니다
「숨 쉬기 힘들어지면 힘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하면, 떡이 목에 걸린 것과 같은 돌발적인 사고라면 그렇지만, 「이것은 『종말기』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다르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군, 이라 생각한다. 단 이「종말기」라는 단어도 꽤 잘 모르는 사용법으로 사용 되고 있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는 종말기는 곧 죽음이 찾아 오는 상태라는 것일 것이다. 어려운 의미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두 가지로 쓰인다.
먼저, 어찌되었던 생명은 끝에 다다르는 시기가 온다. 그러한 신체 상태는 존재한다. 지금 어떤 사람의 상태가 정말 그러한 상태인가에 대한 판단은 어렵지만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지금부터 수고스럽게도 신체에 구멍을 뚫어서 기계를 꼽아 넣는 것이 좋은 것일까. 좋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또 한 가지「그대로 놔두면」 생명이 유지되지 않는, 그런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호흡을 보조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약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버리는 경우다. 그리고 이 책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병으로 인공호흡기를 붙일 지 말지, 결정해야 할 다수의 경우는, 이러한 경우이다. 그리고 그것이「말기」「종말기」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건 이상한 것이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많다. 사고로 인해 출혈이 발생한 경우에도, 여러 위중한 병에 걸린 경우에도 그럴 것이다. 그건 뇌졸중일 수도 있으며, 폐렴일 수도 있다. 암을 앓은 경우에도 절제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를 모두「종말기」라 하여,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ALS와 같은 난병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종말기의료의 (자기)결정」이라 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므로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하는 게 정당하다.
■어떤 도구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안경과 비교할 때 인공호흡기는 크기도 하고, 과장된 외관을 하고 있다. 호흡곤란한 상태가 되어 정신을 잃고 정신을 차려보니 호흡기를 달은 자기 자신이 있어, 그러한 장면이 충격적이었다고 서술한 사람이 있다. 다수의 사람에게, 그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목구멍 가장 안쪽에 꽂아넣어져 있다」라 하지만, 그런 곳에 그런 것이 꽂아넣어져 있다. 손이나 발에 무엇인가를 꽂는 것과 비교할 때, 안경을 끼는 것과 비교할 때 이건 심각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무엇이든간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어서, 사람이란 새로운 것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다. 내가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는 방법도 익숙해지는 법도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쓰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기계 그 자체는 곧 눈에 익게 되고, 사람에게 따라서는 든든하게도 느껴지며 기계를 사용하는 것에도 익숙해져 간다. 나는 그다지 빈번하게 그 사용자들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익숙해져 버렸다. 대개의 것들은 그렇게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는 것이 모두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신체를 움직이거나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워 지는 등, 행동에 대해 큰 제약이 뒤따르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확실히 꽤나 고생스러운 점이다. 다만 이것은 호흡기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호흡기를 꼽던 꼽지 않던간에, 근육이 쇠약해져서 자신이 발음을 내기 힘들어 지게 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한편, 스스로 발성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면, 호흡기를 꼽아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자세하게 써주실 것이라 생각하므로, 이 이상은 쓰지 않을 것이며, 쓸 수도 없지만, 인공호흡기는 본래 간단한 기계이므로, 그 기계의 사용 방식이 보다 간단해 지거나 휴대가 편리해지고 있다고 보인다.
그것이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면, 그 사람에게「살아가라」라 말하는 것은 가혹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더이상) 호흡기를 꼽지 않는다(더 이상 사는 것을 중단한다)」라 그 사람에게 호소하는 그 상대는 예를 들어 그 병원의 관계자일 수 있다. 즉 그 사람은「이 병원(의 내가 있는 곳)은 죽고 싶어질 정도로 좋지 않은 곳이다」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네, 그렇다면 죽여주세요」라 대답하는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생활이 재미나게 되도록, 지루하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들은 있다. 이런 것들을 하지 않고, 이 생활이 힘들다면, 지금부터 힘든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계속 살아가는 것을 멈추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틀린 것이다. 그 전에 해야 할 것들을 해야 한다.
신체 상태의 변화에 따라 생활은 바뀐다. 할 수 없는 것들은 늘어만 간다.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이 움직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 주변의 세계는 거기에 있으며, 그 다양한 모습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세계가 언제나 그대로 똑같다면, 따분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한 즐거움 따위가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과 비교해서냐라는 문제도 있다.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며 그리고 다소간 즐거움도 있다면 그건, 자신이 그 세계에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보다 있는 편이 나은 것이다. 이러한 단순소박한 점에서 출발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은 법이다.
■선택해서 결정하는 것인가?
인공호흡기를 꼽을 것인가 말것인가는 어디까지는 본인 의사에 달려 있으며, 결정하는 것은 본인이다, 라 여겨진다. 옛날에는 의사가, 그리고 가족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 왔지만,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결정하는 것은 본인이다 라는 식이 되었다. 그리고 의료자 등 타인은 중립적인 것이 바람직하다라 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이야기는 꽤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공호흡기의 경우「달까요? 말까요? 어떻게 할까요?」라 묻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은 실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 것은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세요, 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보통 하지 않으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고 싶다」혹은「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라 하는 누군가에게「당신 마음 대로 하세요」라고 하는 것이 된다. 이런 건 흔치 않은 것이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라 대답하게 될 것이다. 그럼, 「왜요?」라고 다시 질문을 받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본인의 의사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자살 방조이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또한 법률에서는 이를 범죄로서 다룬다. 물론 현행 법률이 어떻든지 간에 자살방조가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는 다른 사고방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호흡기를 달지 않겠다는 결정, 호흡기를 다는 것을 빼내는 결정이,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도와준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식해둘 필요가 있으며 이를 인정하는 것은 자살과 자살을 도와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도 확실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호흡기를 다는 것과 떼는 것
인공호흡기를 다는 것과 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달지 않는 것은「(치료의)미개시」이며,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며 자살을 방조하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일단 달아버린 호흡기를 빼내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이며, 살인, 자살방조이다. 이렇게 되면 후자는 해서는 안되지만 전자는 허용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떼내는 것/떼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순간의 이전에 호흡기를 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제된다. 일단 호흡기를 달게 된다면, 떼려 해도 뗄 수 없으므로, 처음부터 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빨리 죽게 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다는 것은 간단하기 때문에) 빼내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확실히 다른 측면도 있으나 결정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뗄 경우에는 이미 목숨이 다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다른 한편, 달지 않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으나, 그 때가 언제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확실히 목숨이 다할 때가 예고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그 차이는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별개로 한다면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살방조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괜찮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틀린 것이다. 어느 쪽도, 심한 표현이라 여겨질 수 있으나, 자살방조이다. (스위치를 온으로 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하지 않는 것, 스위치를 오프로 한다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 양자 간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양자 모두 용납될 수 없는가, 양자 모두 괜찮은 가, 둘 중 하나인 셈이다. 학자들 중에는 소극적인 행위도 적극적인 행위도 결국에는 똑같으니, 독을 먹이는 것도 포함하여 모두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호흡기를 떼는 것이 문제라면 달지 않는 것도 문제라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04.
그렇다면 실제로 호흡기를 달아 버렸지만 아무래도 떼고 싶어진 경우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적인 해법은 떠오르지 않지만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있다.
첫째로 매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매일 말하게 될 것이고, 듣는 사람은 매일 그것을 계속 들으며,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라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죽을 수 있어서 이를 말리는 것보다는, 더 힘들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한가지 역시 고통스러움이 있으므로,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울 때, 죽어버리면 고통은 없어진다라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아니 오히려 죽어서 고통을 없애는 것을 고통을 없애는 수단이라고, 우리들은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무엇인가는 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렇더라도,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 때에는 죽음을 도와줘서 감옥에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확실히 그것은「선의」로 이루어지는 것일 테다. 이 경우 자살 방조를 특별취급하는 것은 괜찮은 것 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정한다?
다시 되돌아 와서, 자기 결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고 싶은 것을 본인에게 물어보고, 그리고 그대로 하는 것은, 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본인의 의사를 지레 짐작하고 본인이 말하는 것을 고지곧대로 듣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라 일컬어지는 경우가 있다. 「애들 취급」을 하고 있다, 「퍼터널리즘」――가부장처럼 행동거지를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지적도 매우 훌륭하지만 이에 대해 좀 더 치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본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이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첫째, 본인에게 좋고 나쁜 것은 타인보다 본인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맛있는지, 맛이 없는 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본인에게 물어본다. 또 본인에게 맡긴다. 확실히 이런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경험하지 않는 것을 그 순간에 결정하게 되는 것이 된다. 말이 전달되지 않게 된 이후에는 이미 늦으므로, 또 사태가 심각하게 되버린 이후에는 동요하게 되므로, 그 이전부터 결정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사전지시」가 그것이다. 그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 경우에 나는 잘 모르겠다.
먼저 이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즉 알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그 이전에 결정해야 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 이전에 결정하라고 한다면 난처할 따름이다. 이미 서술한 바대로, 본인이 결정하는 가장 좋은 점 한가지는 본인이 결정하여 발생하게 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인데, 이 경우에는 본인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본인이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본인에게 맡기는 편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은 자신이 그런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상태를 상상 혹은 다른 예를 보고 판단하게 되는 데, 그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본인이라면 죽을 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사전에 결정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이란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일단 결정해 두고 변경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미 결정한다는 것,이 그다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도 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의사의 변경을 전달하려 했을 때, 최후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잘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숨이 멈추게 된 이후부터는 결정하는 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므로――그 때 무엇을 생각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덧붙여서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에는 사람은 대체로 우울해지고, 어두워진다. 그런 때에, 무엇을 결정해도 좋아, 당신이 결정해야 해, 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저항이 아닌, 영합이 되어버린다.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다수의 경우, 타인이 그 사람에 대해 말 참견을 하는 것은, 그 타인의 입장에서 좋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시설 직원이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생활자들에게「당신은 (건강을 위해) 빨리 자는 게 좋아」따위를 말한다. 이런 경우에는 생활자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 수 없다.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본인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우선시 하는 게 좋다. 즉 사회의 대세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결정이 유효하다.
그러나 호흡기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사회적 흐름이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라 한다면 죽음의 결정은 이에 대한 저항이 된다. 그렇게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다. 즉 근대의료는 본인에게 관계없이 멋대로 막대한 의료를 행해 버리고 있다는 견해이다. 혹은 가족은 본인의 의향을 묻지도 않고 연명을 주장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된다.
이런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실도 있다. 예전에 입원시켜 수많은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 수입으로 이어지던 시기에는 의료자들은 사람을 무리하게 끌고 들어와 의료를 행하였으나, 그러한「낭비」는 점차 줄어들었으며, 갖가지 의료를 행하는 것은 타산에 맞지 않고 경영에도 좋지 않게 되었다. 행하는 만큼 손해를 안게 되었다. 따라서 오히려, 필요한 것도 피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가족이 전면적으로 그 사람의 생활을 보살피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다.「임종의 순간」을 놓치는 것은 안된다라 하여 심폐소생으로 임종 시기를 늦추려는 경우와는 다르다. 가족이「연명」에 소극적이 되는 것인 꽤나 흔하게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현실은, 계속 사는 것을 빨리 종료시키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서 본인이 죽을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사회의 흐름에 저항하여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인이 주위 사람들을 생각하고, 짐작하여 그 기대를 실현하도록 작용하게 된다★05.
이렇게 살펴본다면 본인이 결정하면 그걸로 좋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요한 것은 필요하다고 명확하게 구분하다
결국 남는 것은 인공호흡기를 단다는 전제하에, 지금부터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요인이다. 이것은 호흡기 장착을 망설이는 요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살아가기 위해 개호가 있다. 호흡 보조는 호흡기가 해 준다 하더라도, 그 외 다양하게 필요한 것들이 있다. 호흡 이외는 그다지 힘든 게 없으며 신체의 다른 부분이 움직이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호흡기를 달기 전에도 이를 단 이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이 개호하고 있다. 현실을 본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된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버린다. 자신이 보살피는 측이라면 그 사람의 케어를 자신이 할 것이라 생각하더라도 타인에게 그것을 의뢰할 수 밖에 없다. 이를 생각하면 몸을 낮추게 된다. 지금까지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온 사람일 수록 그러한 것을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은 지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수정하는 편이 좋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온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이 살기 위해 일해온 것이므로 바람직한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좋은 것이었던 것이다. 즉 살아있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 일하였던 것도 좋은 것이다.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것을 멈추려 하는 것은 전혀 본말전도인 것이다. 주변의 도움을 얻어 살아가는 것에 소극적이 될 필요는 없다.
■가족에게 보다 중요한 의무는 없다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필요하므로 필요한 만큼 얻자. 그렇게 결심했어도 실제로는 살아가기 위한 개호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무리다, 사는 것을 그만두자, 라는 식이 되버린다.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먼저 그 생활을 지탱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 것처럼 일컬어지나,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앞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인공호흡기는 그렇게 대단한 기계가 아니다. 전자 렌지나 냉장고보다 훨씬 단순한 기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수요가 있지 않기 때문에 가격은 싸지 않지만 더 저렴해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특별히 비싼 것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그 외에 필요한 것도 유별난 것이 없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사람의 손 뿐이다. 즉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그리고 이후, 사람은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은 닥쳐오지 않는다.
따라서 본래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힘들다. 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 그것은 부담할 수 있는 사람이 부담하지 않고, 매우 적은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가족들이, 그 사람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족의 불편함을 보살피는 것은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는가라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렇지는 않다. 가족에게 보다 큰 의무를 인정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렇게 말한다면 무책임을 조장한다는 둥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있으나, 그 반대이다. 가족에게도 의무는 있다. 있기는 하지만 그 의무는 가족이 아닌 타인들과 동일한 정도의 의무이다.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바대로, 가족에게는 보다 더 막중한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크기란 자식이나 배우자에 대한 다른 가족의 보통의 의무와 똑같은 크기임에 분명하다. 중증 장애와 관련된, 보다 커다란 부담 분은 가족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가족이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가족으로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족이 고통스럽지 않을 상태에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사회가 가족을 중요시 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가족이 보다 잘 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회는 가족의 부담을 경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타인을 활용하는 것
하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가족의 부담은 줄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가족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즉 부담을 강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요인도 있다.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그 사람과 오랜 기간동안 함께 지내서 그 사람의 버릇이나 생활 습관에 익숙해져 있자면, 확실히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 하기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전달되기 쉽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새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알지 못하는 것도 있으며 익숙해져 있지도 않다. 그리고 신체의 미세한 위치가 고통과 관련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따라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그렇게 그 사람을 거부하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역시 이 장면에서도 매우 소수의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쏠려 있는 현상이 발생한다. 결국 가족만이 남게 된다.
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그렇게 생각 될 때도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 힘을 낼 때도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본능적으로 필사적이 된다(火事場のばか力)」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하여 도움을 받고 한 건 해결하고, 문제 해결을 하고, 이렇게 된다면, 그걸로 됐다.
하지만 다수의 질병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도움이 장시간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특정 사람만이 간호를 할 수 있는, 또는 실제로 하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을 환자 본인도 알게 된다. 그래서 쌍방이 점점 더 어둡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파탄에 이르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는,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다수의 사람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 사람이 가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고쳐먹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한 가족들이,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다.
따라서 그 주변 사람들은 가족이 솔선하여 부담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부담하고 있는 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지 않도록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쓸데없어 보이는 참견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제도를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 한 사람에게 책임을 부담시키지 않으며, 그리고 부담할 필요도 없다. 해야 할 것은,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책임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담시켜 가볍게 하는 것 뿐이다. 모두가 세금이나 보험료를 납부하고 그 돈을 월급으로 받는 개호를 직업으로 행하는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이 좋다. 한 사람에게 그 일을 부담시킨다면 매우 힘든 일이 될테지만, 다수의 사람이 관여하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사회전반적으로도「개호의 사회화」등이 이야기되고 부담해야 하는 것은 가족만이 아니라는 방향으로 점차 변화해가고 있다. 그러나 명목적으로는 사회전체가 의무를 진다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실은 어떠한가.
일본은 복지 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은 심각한 국가 중 하나라 일컬어지며 이것에는 지당한 면이 많다. 그러나 중증 장애인의 개호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라 말할 정도는 아닌 측면도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한 방법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반드시 있다.
「공적 개호보험」만으로는 그렇게 커다란 보탬이 되지 않으며 자기부담도 상당한 액수에 달하지만, 그럼에도 개호보험을 우선 활용하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자주 있지만――실제로는 항상 개호보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없다――「장애인 자립지원법」으로 규정된 제도도 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사전에 결정된 조건이 없다. 그 외에도 방문간호 제도 등도 있다.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 복수의 제도를 조합하여 최대 1일 24시간동안 공적인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즉,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개선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교토시도 ALS인 사람으로 개호를 받으면서 혼자 자택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이전에는 그런 생활을 보낼 수 있을 만한 서비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그 사람은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구청 등과 교섭하여 지금까지 인정되어 왔던 시간 보다 훨씬 장시간의 서비스를 획득하였다. 그래서 적어도 현재에는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토의 그 사람의 경우에는 가끔은 그러한 교섭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다수의 경우에는 좀처럼 그렇게는 진행되지 않는다. 보통 구청에 가서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게 된다. 더 힘든 것은 가끔씩 구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틀린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모른다고 말해주면 좋았을 것을. 때로는 난처하게 된다. 이렇게 잘 전달받아야 할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6.
하지만 그런 때를 대비하여 본인이나 본인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다. 여기에도 환자・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의 존재의의는 매우 크다.
■주
★01 ALS에 대해서는 의학서원 간행의 졸저『ALS――부동의 신체와 숨쉬는 기계』(2004)가 있다. 이 책은 내가 집필했다기 보다는, ALS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ALS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사람들에게 무엇을 들었는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호흡기를 다는 것에 대하여 역시 어떠한 말들을 듣고 어떠한 것들을 생각하였으며 고민하였는가, 무엇이 발생하였는가, 어떻게 사용해 왔는가, 그 사람들 스스로가 쓴 글들을 소개하면서, 호흡기를 다는 것과 달지 않는 것, 빼내는 것과 빼내지 않는 것 등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찰해 본 책이다.
그리고 「안락사」「존엄사」에 대해 생각해본 책으로 츠쿠마(筑摩)서방 간행의 『좋은 죽음』(2008)『유일한 생』(2009)이 있다. 또한 청사사 간행의 『약한 자유를 향해』(2000)『희망에 대하여』(2006)에도 몇 가지 관련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02 『ALS』235-238페이지.
★03 인공물을 사용하여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죽음』제2장「자연스러운 죽음 대신의 자연스러운 수용으로서의 생」.
★04 이 논의에 대해서는 『유일한 생』의 생의 제1장「인명의 특별함을 말하지 않다/말하다」.
★05 다수의 경우 자신에게는 좋은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자기결정이 「죽음의 결정」의 순간에는 다르나는 것은 『약한 자유를 향해』에 수록된 「괜찮은 죽음・굴욕적인 죽음」.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좋은 죽음』제3장「희생과 부족에 대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과잉」이라 파악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일한 생』제3장「유한하기도 하므로 회피하는 것에 대하여――그 시대에 일어난 것」
★06 이상에 대하여 생활서원 간행 잡지『생존학』창간호 게재의 니시다 미키(西田美紀)・하세가와 유이(長谷川唯)・야마모토 신스케(山本晋輔)・홋타 요시타로(堀田義太郎)의 논문을 읽어주시길 바란다(일반 서점에서 주문가능).
*작성:곽정란(번역:곽정란)
UP: 20150820 R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