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Tateiwa > 2000-2009 >

논쟁으로서의 생명

의료와 사회 북 가이드・34)

다테이와 신야(立岩 真也) 2004/01/25 『간호교육』45-01(2004-01)
http://www.igaku-shoin.co.jp
http://www.igaku-shoin.co.jp/mag/kyouiku/

[Japanese Page]

트윗하기
last update:20151114


「논쟁으로서의 생명」

창간 32주년을 맞이한『현대사상』이라는 잡지가 있다. 나 자신은 1980년대 이 잡지에 흥미가 없었으며, 한동안은 어떤 특집을 꾸미고 있는 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흥미로운 특집이 기획되기 시작하여, 그 때 즈음부터 읽게 되었다.
이 연재의 주제와 관련된 특집도 있다 2000년 후반에는 2000년 8월호 「감정노동」, 9월호 「건강이란 무엇인가」, 2002년 2월호 「첨단의학」, 6월호 「초고령화사회」, 2003년 7월호「바이러스와의 조우」.
그리고 앞 회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다루었는데, 2003년 11월 호 특집이 「논점으로서의 생명」.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대학원네 개의 주제 영역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하나가 「생명」이며 (나는 「공공」), 「논점으로서의 생명」은 그 프로젝트의 명칭이기도 하다. 이번 회에는 생명 영역의 교원인 마츠바라 요코(松原洋子)(전공은 과학사, 2002년 1월호 연재(제12회)「우생학에 대하여・4」에 그 이름이 나온다)와 내가, 이 특집에 누구한테 집필을 부탁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출판사 편집자에게 추천하는 일에 관여했었다.
이 마츠바라도 글을 썼고, 같은 대학원 같은 영역의 철학 전공자인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도 글을 썼다. 작년 『레비너스――무엇을 위해 사는가』(NHK출판), 『생식의 철학』(가와데(河出)서방신사)등 두 권의 저서를 낸 고이즈미는 「생명윤리」에 싸움을 걸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알기 쉽고 지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어려워 보이는 것을 언급하는 사람을 추켜세울 필요는 없지만, 어려워 보인다고 해서 멀리하는 것도 손해이다. 이 잡지 자체가 「사상 오타쿠」잡지처럼 되어가고 있는 지 모르나, 그러한 사람들을 단지 경원 혹은 경멸하는 것도 유치할 지 모르며, 조금씩은 친해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다만 이번 11월호에 게재된 글들의 집필자들 대부분은 「사상 연구」쪽 사람들은 아니며, 각각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내 자신이 그러한 글을 읽고 싶었으며, 써주길 바랬다. 나는 「현대사를 향해――권유를 위한 시론」이라는 글을 썼다. 이 사회에 있었던,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일들을 알아두는 게 여러모로 좋으므로 찾아보자고 호소했다. 이 주제 이외에는 거의 쓴 게 없는데 긴 문장이 되버린 것은, 나에게는 이렇게 전후의 흐름이 보인다(하지만 제대로 찾아보지 않아 잘 모른다)고 썼기 때문이다. 이 연재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그 저작도 꽤 다루었으며, 이 글에는 연대의 각 호별로 그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조감도와 같은 성격도 있었다.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 이 특집 전체를 소개할 수는 없다. 관심이 있는 4편만을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한다.

◇◇◇

   앞 회에 그 저서『 단 하나뿐인 크레올』을 소개했던 우에노 세이고(上農正剛)는, 「의료의 논리, 언어의 논리――청각장애아의 입장에서 이익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공내이」수술 등으로 청각장애인에게 언어음성을 획득시키려는 것으로 얻는 것, 얻을 수 없는 것, 잃는 것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제17회(2002년 6월호)에 소개한『임상사회학의 실천』(노구치 유지(野口裕二)・오무라 에이쇼(大村英昭)편, 유히카쿠(有斐閣))에 수록된 「낫는 것에 대하여」에 나도 누가 무엇을 얻는 대신에 무엇을 지불하는 가 또 잃는가를 제대로 보자고 글을 썼었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렇게 호소하였을 뿐이다. 우에노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에 입각하여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글을 썼다.
또한 이학요법(理学療法)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며, 특히 뇌성마비인 사람들의 2차 장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후루이 토오루(古井透)는 「재활의 오산」에서 뇌성마비인 사람들이 아이였을 때 경험한 재활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던가를, 인터뷰조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현재 40세부터 50세인 이들은 부모에 끌려 다양한 것들을 경험했다(경험당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람들의 경우) 결과적으로는 좋은 점들은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도 가끔 듣는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기억하고 있을 때 그 당시의 것들을 제대로 (누군가가) 듣고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방법의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 기묘한 사람 운운하면서 텔레비전에서 크게 보도되거나 책으로 나오는 일이 있으므로, 그것은 단지 과거의 것들만도 아니다.
또 소박한 의문으로 효과가 없음이 확실한 기술이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계속 사용되어 온 것은 왜일까, 그리고 사라질 때가 온다 하더라도 어느 샌가 그다지 논란이 되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도대체 왜 일까. 의문은 단순하지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본인, 의료·복지의 학계·업계, 가족, 이들 내부(예를 들어 장애아 부모와 부모 간의 관계), 그리고 상호관계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후루이는 이학요법사를 하면서 의학계 연구과의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적하고 있기도 하다. 주로 이런 논문을 제출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 잡지에서는 스스로의 체험과 인터뷰 조사에서 얻은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써주길 바랬다.
치료를 하더라도 그다지 진척이 없는 경우도 있으며, 잘 된다 하더라도 얻어지는 것과 잃게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태나 지불된 것에 대해, 기술 개발과 그 응용을 전문으로 하는 측이 기록하고 이를 공개하는 것은 일단 그다지 없다. 잘 진척되지 않는 것을 잊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사용하는 측 혹은 사용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측의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곤란하다. 조사하여 글로 쓰는 게 좋다. 그리고 이를 쓰는 사람이 기술 개발이나 실제 응용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통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후루이가 이 글을 써준 의의는 매우 크다.

◇◇◇

  「존엄사」라는 단어는 어딘가 이상한 점이있다고 생각된다. 이 연재에서도 제4~7회(2001년 4~7월호)는 「죽음의 결정에 대하여」였다. 다만 실제로 존엄사라는 단어가 어떻게 나타나고 일반화되어 갔는가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1980년대부터인가 라는 정도였다. 그 이전에 「일본안락사협회」라는 조직이 있었으며, 이 단체가 「일본존엄사협회」로 그 이름을 개정한 것도 1983년이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더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오타니 이즈미 「「생명의 교육」에 은폐되어 버린 것――「존엄사」담론을 둘러싸고」는 신문기사를 조사하여 신문지상에 존엄사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이 「식물상태」에 있는 미국 여성의 인공호흡기의 제거의 시비가 재판에서 다투어진 카렌 안 퀸란 재판의 주 최고재판결정을 전한 『아사히신문』의 1976년 기사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에 담겨진 의미(의 곤란)를 밝힌다 더 나아가 안락사와 존엄사의 단어 구분을 일본안락사협회의 설립자인 오타 덴레이(太田典礼)는 강하게 비판하였지만, 계몽운동을 위한 타협책으로 모임의 명칭 변경을 받아들였다는 경위가 있다고 서술된다.
오타니는 전후 일본의 죽음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를 검증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 생이며 동시에 고등학교 사회과의 교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 「다시 교실에서 회자되는 「존엄한 죽음」에 대하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죽음」을 언급할 때, 과도한 연명치료 속에서 지금은 인간이 다양한 튜브가 이어져 스파게티 증후군이라고까지 불리며 죽었음에도 죽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 제시되고, 그 뒤 「안락사」나 「존엄사」의 시비를 묻는 토론이 행해질 때가 종종 있다. 혹은 「과도한 연명치료를 절제한 존엄사」가 엘리자베스 큐브러 로스의 「죽음의 수용의 5단계」와 함께 소개된다」
토론은 가치의 승패를 겨루는 것이 아닌 설득술을 겨루는 것이므로 「안락사나 존엄사」의 시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어, 대답을 학생에게 맡긴다고 실천자는 말하나 위의 문맥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이하 생략)」(p.193)
「존엄있는 죽음을」과 「생명을 귀중하게」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총론적으로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다. 「생명의 교육」에서도 확실하게 찬성 혹은 추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은 제31회(작년 10월호)에 소개한 무카이 쇼코(向井承子)『환자추방――갈 곳을 잃은 노인들』(츠쿠마서방)에 묘사된 사태와 직결된다.
그리고 이상은 실제로는 제9~12회(2001년 10월~2002년 1월호)에서 책을 소개한우생(학・사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가 에 대해서는 특집 머리말에 마츠모토와 가네모리 오사무(金森修)의 대답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역사적인 연구로서는 교육학 대학원생인 구와하라 마키코(桑原真木子)의 「우생학과 교육――「교육적」환경조작이 도착한 곳」이 게재되었다.
우생학에 대해서는 다양한 점들이 문제시되지만 그 하나는 우생학을 생득설로서 거론한 뒤, 그렇다면 이를 비판하는 것이 환경설이다, 교육(학)은 환경설에 입각하며 우생학과는 무관계이며, 우생학을 비판하는 학・실천이다, 라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구와하라는 전전의 일본 교육학과 우생학 간의 관계를 검증하고, 양자가 무관계가 아니라 항상 적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는 논문 뒤에 남겨져 있지만 이것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이 확인 작업은 필요하며 유효적이다. 이렇게 나는 확신을 가지고 연구를 지향하는 사람을 현대사 쪽으로 관심을 옮길 수 있도록 부채질 하고 있다.

[표지사진을 게재한 책]

『현대사상』31-13(2003-11) 특집:쟁점으로서의 생명, 1238+税=1300


*작성:임덕영(イム・ドクヨン)
UP: 20031203 (koreanPage UP:20151009 REV:)
의료와 사회 북 가이드  ◇의학서원의 책에서  ◇신체×세계:관련서적  ◇서평・책 소개 by 다테이와  ◇다테이와 신야(立岩 真也) 
TOP HOME (http://www.arsv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