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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의 시대를 살아』

니시가와 나가오(西川 長夫) 20130524 『식민주의의 시대를 살아』,平凡社,622p.
[Japanese]

last update:20140224

■니시가와 나가오 20130524 『식민주의의 시대를 살아』,平凡社,622p. ISBN-10: 4582702953 ISBN-13: 978-4582702958 [amazon][kinokuniya] 4800+ ※ s03.

■광고

내용소개
조선에서 태어나 점령하의 일본으로 돌아 와, 전후냉전체제과 글로벌 시대에 국민구가와 식민주의를 비판해 온 필자가 원폭/원자력 체제의 손을 된 32편
내용(「북」데이터 베이스)
조선에서 태어나 점령하의 일본으로 돌아 와, 전후냉전체제과 글로벌 시대에 국민구가와 식민주의를 비판해 온 필자가 원폭/원자력 체제의 손을 된 32편

■목차

머리말

Ⅰ국민국가론재론
 1 제국의 형성과 국민화
 2 프랑스의 해체?――또 하나의 국민국가론
 3 글로벌화와 전쟁――이라크점령의「일본모델」에 대해서
 4 글로벌화에 따른 식민주의와 나쇼널리즘
 5 구미화와 회귀――국가주의적인 표상을 둘러싼 투쟁에 대해
 6 나쇼날리즘과 민족주의――쓴원과 타고르의 민족주의론을 단서로
 7 프랑스혁명재론――혁명은 식민주의를 극복했는가
 8 『루리・보나파르드의 브뤼메르의 18일』――보나파르뒤즘에 대한 사적인 회상

Ⅱ식민주의의 재발견
 9 68년혁명 재론
 (1) 장벽의 언어――국민국가론의 여백에
 (2)파리의 68년
 (3)파리 5월 혁명――세계적인 학생반란의 의미
 (4)종교학의 죽음 혹은 1968년 이후 살아 남은 것
    ――礒前順一저『종교개론 혹은 종교학의 죽음 宗教概念あるいは宗教学の死』에 대한 서평
 10 식민주의와 귀순자의 문제
 11 식문주의의 재발견
 12 내게 있어서의 조선――늦게 온 청년의 일탈에 대해 만년에 대해
 13 두 개의 폐허에 대해
 14 동일본대지진에 의해 드러난 것 ――원전과 글로벌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Ⅲ 다언어・다문화주의 재론
 15 다언어・다문화주의를 아시아에서 묻다
 16 다문화주의의 부정의
 17 탈서구적인 언어와 교육언어――글로벌화의 가운데 언어와 아이덴티티
 18 차이와 아이덴티티를 위한 투쟁의 앞에 보이는 것
    ――타코르와 일리치를 단서로
 19 다문화공생과 국내 식민주의
 20 언어에 의한 독재제와 식민지화와 식민지화――『프라스틱・워드』를 읽다
 21 문화의 국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동아시아의 공동무형문화유산의 사레를 단서로
 22 타버린 국경――유럽의「교외폭동」에 대해

Ⅳ스탕달의 전후문학
 23 스탕달의 만년――겨울의 이탈리아기행
 24 가짜 이름과 로마네스크――스탕달의 이름을 바꾸는 취미를 둘러싸고
 25 織田作之助와 스탕달, 혹은 교토의 織田作之助에 대해
 26 다시 살아난 프랑스 혁명――스탕달의 전후
 27 기조와 스탕달의 문명관을 둘러싸고
 28 전후 문학 재고――9・11의 이후
 29 太宰治재독――약자의 유토피아를 둘러싸고
 30 일본의 스탕달 수용의 문제――〈나〉는 어떻게 스탕달을 읽었는가
 31 작가의 죽음과 부활――La Vie Murmuree(『매일 매일의 혼자말 日々の呟き』)을 읽고
 32 폐허와 생체실험――3・11의 이후에

맺음말을 대신하여

니시가와 나가오・약력과 저자목록(内藤由直작성)

■인용

◆맺음을 대신해 578-581(전문)

 「본서는 나의 마지막 논집이 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처음으로 여기에 이르게 된 경위를 밝히고 싶다. 나는 수년전 千凡社의 関正則시에게 2, 30편의 논고를 맡겨 「재론의 때」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재고의 때」라는 타이틀을 생각한 주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그 하나는 여기에 모은 논고의 대부분은 나의 맨 처음 퇴직(리츠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와 두번째 퇴직 동대학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 맞춰 나를 초대해 준 국내나 국회(한국, 타이완)의 대학, 연구기관에서의 심포지엄이나 강연회 등에서의 발언도 있으며 나는 그것을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을 재검토 그리고 재출발의 기회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으면 나를 초대해 함께 논의를 해 준 분들께 작지만 예의가 될 꺼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이유는 지금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전후 최대의 전환기는 마침 「재론의 때」이며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악조건이 겹쳐 이 「재론의 때」의 출판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겨우 2012년 5월에 関씨가 이 예정된 책에 「식민주의의 시대를 살아」라는 타이틀을 붙여 平凡社의 편집회의에 제출한 때 크게 기뻤다. 関씨는 『〈신〉지주논의』(2008년)을 출판해 주었다. 그 때는 아직 식민주의를 타이틀로 한 책은 많지 않아 나는 책의 타이틀은 거의 항상 편집자에게 맡겨지만, 이 때는 내 의견대로 했다. 그렇지만「재론의 때」로 부터 벌써 시간도 흘러、9・11에 이어 3・11가 있었으며 시대의 흐름도 급격하게 심각한 도를 넘었다. 나도 그동안 현재 글로벌시대의 식민주의에 관한 문장을 새롭게 몇편 적어두었다. 「재론의 때」에 예정된 문장을 그대로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올해(2012년)의 8월에 제3안으로서 「식민지<0578<주의의 시대를 살아」의 타이틀은 그대로 하고 싶지만, 본 내용과 구상을 꽤 바꿔 제안을 했다. 내용과 구상을 바꾸고 싶다고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내 건강상태가 상당히 악화되어 있어 그리 오래는 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지막 논집으로 정했을 때, 그렇지만 페이지수는 제한되어 있는 때 어떤 논문이 가능할까. 나는 우선 두 가지의 방침을 세웠다. 첫번째는 자신의 일의 출발점(초심)을 보여줄만한 작품과 현재의 최종 지점을 보여주는 작품을 내세울 것. 당연하게 최후의 지점음 사고 중에 있어서 필요한 가필과 재고도 되어 있었지만(최후의 수편은 결국 입원 중 병상에서 적게 되었다), 그 여백과 혼란을 그대로 남겨 두고 싶다. 나는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나는 전문의식이 없으며 적거나 말한 것은 항상 영역횡단이 되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일단을 알기 위해 최소한 세개나 네개의 영역(역사, 국민국가론, 다문화주의비판, 전후문학론 등)을 보여 주듯이 구성을 생각해 했다(전체의 콘텍스트는 内藤由直가 만들어 준 「저자년보」를 참조해 주면 좋겠다).
 내가 이런 스타일로 문장을 쓰게 된 것은 이른바 68년 혁명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1967년부터 69년에 이르기 까지 2년간 프랑스 체재를 마치고(졸저「파리5월 혁명 사론』을 참조해 주면 좋겠다), 본 학교에 부임햇을 때 나는 교원으로서의 직무는 열심히 임하지만, 이른바 학게나 아카데미즘과는 가능한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물론 나는 국미나 일본 근대의 많은 국민문학을 애독하면서 그것에 의해 길러진 세대이며, 또 대학 입학 이후는 근대 아카데미즘이 만들어 낸 위대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 국민국가의 시스템 중에 위치지어진 작품이나 연구가 가진 이데올로기성이나 한계도 자명하다. 나는 또 자신이 살아온 시대 가운데 최소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저널리즘의 본류와는 가능한 거리를 두지만, 그 주변에 자신의 발언이 가능한 위치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인가. 다행이 나는 독자적인 식견을 가진 몇 명의 우수한 편집자와 만나 또 소수이지만 정열적인 독자의 덕분에 지금까지 자신의 포지션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할 따름이다.<0578<
 반아카데미즘과의 관계로 말하자만 나는 일시 논문이라는 말이나 형식에 거부감을 가져 자신의 저작에 이것은 논문집이 아니라는 타이틀을 붙이려고 한 적이 잇다. 이것은 다행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같은 무렵 멀리 살고 있는 장애인 친구로부터 드디어 박사논문을 마칠 것 같다는 편지를 받고 나는 박사논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는 쌀쌀한 답장을 한 것을 지금도 마음으로 후회하고 있다. 그는 결국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논문 특히 박사논문이라는 것은 왜 그리 기묘한 형식인 것일까. 나도 과거의 역사적인 학술논문이 많지만, 20년 30년 걸려 박사논문으로 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감동적인 저작도 많다. 그렇지만 지금은 박사논문 양산의 시대이다. 그리고 박사논문이 대학이나 아케데미즘의 권위를 지지하는 중심적인 시스템이 더욱 분명하게 되어 버렸다. 중요한 것은 몇 줄로 적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몇 백 페지를 필요로 하는 게다가 각장에 몇 십개의 주를 붙이는 권위주의의 전형일 것이다. 물론 나는 대학원생들에게 표본이 될 만큼 완벽한 박사논문을 쓸 것을 권하고 있다. 물론 진짜로 반항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아케데미즘의 작법에 정통하여, 그 모순과 허무함을 철저하게 맛 본 사람들의 사이이기 때문은 아닐까.
제 자신의 저작 중에 가장 가카테믹한 느낌을 갖추고 있는 것은 1984년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프랑스의 근대와 보나파리티즘"일 것이다. 여기에는 "사상"에 게재된 '논문 외에 교토대의 인문연의 공동연구(河野健二班、阪上孝班)에서 한 보고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뒤에 알아차리게 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박사호 청구논문이라 생각하고 편집자인 加藤亮三씨도 이러한 훌륭한 정장의 책으로 해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러한 기분은 전혀 없었으며 이러한 논문적인 문장을 계속 써내가는 것에 약간은 익숙해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논문이 아닌 논문의 패러디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상호 교차하는 일본과 프랑스의 근대의 하나의 아이러니한 것이며, 나는 결국 출판 후 10년 가까이 지난 이후 이 책으로 박사호를 청구한다. 그것은 근무학교에서 신학부 창설을 위해 박사호를 가진 교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제1영역인 문학, 스탕달이나 프랑스 문학<0380<학에서 박사호를 따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결국 제2 영역(역사)에서 박사호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말기의 눈으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다양한 발견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내가 써온 것은 거의 모두 대화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말주변이 없어서 단상에서 말을 잃어버려 자주 말을 멈춰버리는 나에게는 이외의 것이었다. “일본의 전후소설 – 허구의 빛”(1988년)은 일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몬트리올 학생 들과의 흥리오누 대화의 기록이다. 『국경을 넘는 방법』(1991년)는 근무학교의 비교문학록의 교실(때로믄 수백명을 넘었는데)에서의 수년에 걸친 지금도 즐거운 대화의 기록이다, 등등. 그 외 거의 대부분의 문장이, 연구회, 심포지움, 강연회 등 장소는 다르지만 어떤 형태의 대화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장을 만들어주신 분들, 힘들지만 대화에 응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강건한 체격을 감사하게 가지고 있지만 대학입학시에 결핵을 앓았으며 재학중에 좌폐상엽의 절반을 절단하는 등 때문에 취직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아카데미즘, 반대학을 주창하면서 결국은 대학이나 대학 친구들에게 신세를 졌으며 대학 주변 외에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부끄러운 것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문장의 원동력은 부정이나 부조리한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도 악화 일로에 있는 세상에 대해 항의하고자 하는 기분이 있었으며 구태여 무엇인가 내 존재를 기록하는 상처를 입히는 정도는 남기고 싶다는 기분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내 문장이 어떤 류의 낙천성과 행복감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것은 예전 桑原武夫 선생이 내 河上肇 론을 평하여 말씀해주신 ‘좌익적 에피큐리언’으로 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함을 드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나와 관련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 궁상을 알고 본서의 출판을 위해 전력을 다해준 평범사 편집부의 関正則 씨와 松井純씨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또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내 가족에게도 감사의 기분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고마웠습니다.
                       2012년 11월 26일 밤
                            기타야마(北山)를 바라보는 8층 병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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