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부자유」론――「무엇이든 자기결정」의 한계』

나카마사 마사키(仲正 昌樹) 200309 치쿠마(筑摩)서방,치쿠마(ちくま)신서432,215p. ISBN:4-480-06132-0 735
[Japanese]

last update: 20151022


■나카마사 마사키(仲正 昌樹) 200309 『「부자유」론――「무엇이든 자기결정」의한계』,치쿠마(筑摩)서방,치쿠마(ちくま)신서432,215p. ISBN:4-480-06132-0 735 [amazon][bk1]

■내용설명[bk1]

이제와서 「주체성의 신화」로 되돌아 갈 수는 없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한 무질서 속에서 「동물적」으로 살아갈수도 없다.근대적인 「자유로운 주체」의 「한계」를 되돌아 본다면, 포스트 모던 상황 속에서 “일단”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좋을까 생각해 나가는 것이 본서의 주장이다.

프롤로그

제1장 「인간은 자유다」라는 허구

현대사상에서의「인간」20
좋은 인간과 나쁜 인간24
아우비슈츠 후의「인간」29
「문명」과「야만」33
※「인간성=인류」의 사상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실현하려는 노력이 나치스가 될 위험성을 지적한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에 대해
※아도르노의 알기 어려움
「아도르노는 그(「야만적 폭력」의 연쇄35)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문명화에 따른 폭력이 증대해 간다고 생각한다. 「야만적 폭력」을 막고 「문명화」하려는 노력이 야만적인 폭력을 보다 넘어선 「더욱 야만적인 폭력」을 만들어 내고 또한 그렇게 하여 파생된 「더욱 야만적인 폭력」도 막으려 하는 노력으로 「더욱 더욱 야만적인 폭력」…으로, 「야만적인 폭력」은 점차 에스컬레이터 하면서 연쇄해 나간다. 이것이야 말로, 문명화되면 될수록 문명을 배후에서 지탱하는 야만적인 폭력을 상승시켜 나가는 「계몽의 변증법」인 것이다.」35

아우슈비츠와 「인간성」의 한계점38
「근대 유럽의 야만=문명의 상징이라고도 말해야 할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철학적 고찰이 시도되어 왔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아도르노와 동일하게 유다계 독일인이며 나치스 정권장악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의 그것일 것이다. 」38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가 “자연”과 “압도적으로 강하게 된 체제에서는 사람들은 독자의 판단을 멈추고 자발적으로 즉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전체」의 목적에 「동조」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자신의 책임으로 독립적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을 그 일부로서 안아주는) 「전체」의 이익에 부합시키는 편이 편하다. 이렇게 「개인의 자유」와 「체제의 동조」가 –적어도 형태 상으로는 – 양립한다는 의미에서 「전체주의」는 통상적인 독재체제와는 상이한 것이다. 」40

「아이히만의 분석을 통해 아렌트가 도달한 「악」의 본질이란 일상적인 「진부함」속에서 자신이 생각할 능력을 상실해 가는 것이다. 조직 속에서 반복적으로 정해진 것을 하는 것 만으로 타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스스로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사람은 점차로 「인간다움」, 즉 타자에 대한 외적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활동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커다란 「전체」로 동화시키는 전체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쉽게 된다. 일단 「전체」와 동화되어 버린다면 자신(들) 이외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며 그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게 된다. 인간적인 자유로운 사고를 빼앗고 동물 무리와 같은 본능적이며 야만적인 집단행동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야 말로 「악」인 것이다. 」41-42

「…아렌트는 데카르트-칸트 이래, 근대사상의 대전제였던 「인간성=자유롭게 생각할」능력의 보편성, 생득성에 의문을 느꼈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의연하게 그러한 「인간성」을 자명한 이치인 것처럼 간주하고있는 “휴머니스트”에 대해 경고를 발하였던 것이다. 「인간성」이란 만들어진 것이다. 」43

「인간성」의 조건43
「서구적인「인간성」의 한계에 대한 아렌트의 사고가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저작이「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1958)이다.」43

「・・・아렌트는 우리들의「인간성」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는 극히 한정적인 환경 속에서 발생해왔다고 주장한다. 「인간성」이란,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진 것이다. 」43

「아렌트는「인간성」을 구성하는 요인으로서(1)「노동labor」(2)「일事work」(3)「활동action」―이렇게 세가지를 들고 있다. ・・・・・・(3)의 「활동」은, 「폴리스」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 「활동」이야 말로, 가장 「인간다운」영위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활동」은・・・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언론이나 설득으로 「타자」에 작용하는 능력이다. 」44

「아렌트는「언어」를 매개로 한「활동」으로「사람」과「사람」「사이의 공간」이, 실체적 및 비유적인 의미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언어」를 사용하면 상호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작용할 때 직접적으로 상대에 접촉하여 물리적 자극을 교환할 필요성이 감소한다. 덧붙어 「타자」를, 「자신」의 일부의 연장이 아닌 상이한 사고를 지니고 있는 별도의 인격이라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유아가 언어를 습득함에 따라 자/타의 구별을 알게 되고 「타자」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하는 것과 중첩되어 이미지하면 알기 쉬울 것이다. 상대를 「타자」라 인정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생각에 대해 타자의 찬동을 얻어야 하며 언어활동으로 설득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45

※폴리스의 중심인 아고라(광장)→「활동」의 장
※「공적 영역」→「활동」으로 의견표명을 하는 장, 폴리스의 공통 관심
 「사적 영역」→생물학적인 생활상의 필요성의 니즈가 충족되는 장46-47

무리하게 확장된「인간성」48
「즉 필자의 해석으로는 아렌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가 인간성으로 넘쳐 흐르고 훌륭한 곳이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서양인 및 그 문명적 영향하에 있는 인간)은 고대 폴리스에 의해 만들어내어진 인간성으로 계속하여 규정되어 왔다」라는 것이다.」49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성」개념의 적용 범위의 확대는 오히려 「폴리스」적인 인간성의 조건의 해체로 이어졌다. 전원이 「인간」으로서 「공적 영역」의 빛 속에서 나와서 발언하게 된 결과, 이 영역을 그늘에서 지지해온 「사적 영역」의 본래의 기능이 저하하고 쇠퇴하였다 라는 것이다. 」50

「아렌트는 그렇게 원래 「사적 영역」에 속하였음에 틀림없을 물질적 제 요소의 혼란으로 인해 「이해」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할 수 없게 된 “공적 영역”을 「사회적 영역Social Realm」이라 무르고 있다. 」52

「즉,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경제」적 이해가 인간의 중심적 관심사인 한에서, 우리들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52

「복수성」의 파괴53
※집단이 한 사람의 인간과 같이 설득을 동반하지 않고 폭력 지배 모드에 들어가다.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일반적으로는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계급적 이해」라는 공통항으로 노동자들을 「하나」의 의지를 가진 「몸」인 것처럼 집단행동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나치즘과 동류인 것이라 간주하고 있다.」53

「국민적 이해이든 계급적 이해이든 사람들이 상호 의견교환을 하는 「이전」에, 전원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한 뒤 이에 가능한한 다수를 동원하려 하는 “정치”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핵으로 하는 「인간성」의 약체화로 통한다. 」54
「아렌트는 폴리스에서의 「활동」을 통해 태어난 「인간성」의 최대 특성은 「다원성plurality」라 한다.」54

약자「해방」론의 위기57
「일본어로「자유」라 번역되는 영어에는 <freedom>과<liberty> 두 종류가 있다. 아렌트는 근대시민혁명에서의 「자유」를 통한 저작 「혁명에 대하여」(1963)에서 이 두 가지를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전자를,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같은 「언론활동」의 공간을 창설하려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에 반해 후자는 물질적인 결핍상황으로부터의 “자유”, 즉 「해방liberation」의 차원에 그친 것으로서 한정적인 평가만을 부여하고 있다.」58

「본심」의 비인간성61
※「기분좋은」것 만은 아닌 본심에 대하여
「아렌트는 실제로 그것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각인이 타자와 공존하기 위해 쓰고있는 「가면」을 벗겨 낸다면 직시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 점점 나온다. 우리들의 “인간성”은 추락할 수 있는 곳까지 추락해 간다. 아니,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계를 알지 못하는 「본심 이야기」에는 우리들이 겨우겨우 몸에 익힌 「가면=페르소나」를 파괴하고 무한한 야만을 도래시키게 할 위험이 있다.」63

「「본심을 말하는 것이 인간적」이다, 라는 안이한 발상은 공적인 연기를 통해 만들어진아렌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성」을 쇠퇴시키고 아이히만과 같이 진부하며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며 안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간”을 만들어낼 뿐이다. 필사적이 되어서 부자연스러운 「가면」을 계속 쓰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과「사람」「사이」에 다양성이 만들어지고 「인간다운」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64-65

서구적「인간」의 종언이란?65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틀에 적용되지 않는 마이너리티의 존재를 강조하는 제 조류→「이러한 조류는 인간본성의 보편적인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근대사상의 안티라는 의미에서 「차이의 폴리틱스」라 불릴 때가 있다.」65

제2장 이렇게 인간은 만들어졌다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의 습득70 ※유르겐 하바마스
「「커뮤니케이션」이란, 원래 입장이 서로 다른「타자」가 서로 경합하면서 「의견」교환하고 「합의=진리」에 이르는 프로세스이다. 당연히 불쑥불쑥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 만으로는 공유할 수 있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에 분명하다. 71

커뮤니케이션의「보편성」과「특수성」73 ※「보편」적이다→하바마스「특수」적이다→아렌트
하바마스→「하바마스는 근대시민사회에서 경제활동의 담당체로서 대두해온 「시민」들사이에 발전해온 커뮤니케이션 형태가(절대왕정에 대항하는)「시민적 공공권」을 형성하고 그것이 점차로 일반화되어왔다는 역사적 분석을, 자신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기점으로 하고 있다.・・・」74→

아렌트→「이에 반해 아렌트는 이미 보아온 것처럼, 인간적 커뮤니케이션(=활동) 능력을,고대 폴리스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과 불가분의 것이라 간주하고 있다.・・・」75
※커뮤네이케이션=「가면」

 커뮤니케이션의 미적 측면78 ※폴리스의「인간적인 활동」의 특성 「레토릭」
「활자나 라디오, 텔레비젼-최신으로는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매개로 하여 「여론」이 형성되는 근대시민사회와는 상이하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의 「언론활동」은, 원칙적으로 「시민」전원이 동일한 공간(광장)에 앉아서 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공적 영역」이라는 것은, 추상적, 이념적으로 존재할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을 점하고 있었다.」79

 「인간성」의 기법82
 「휴머니즘」의 근원84
「근대인은「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들이(재)발견한「인간」을, 가면을 벗은 완전한야생의인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18세기 이후의 「자연인」관의 편견을 통해 “인간”을 이미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근대인에게는 이성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이 이상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에게는 「고대」라는 매개없이는 「인간본성」을 표상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휴머니즘」이란 「생생한 고대」의 에크리튀르를 발굴하는 것을 통해 당시까지 함몰되어 있던 「인간성」을 생생하게 부활시키려는 활동이었던 것이다. 」86

반계몽주의적 계몽주의자로서의 루소-87 ※매개없는「생의 인간」을 재발견하려고 하였다, 는 것에 대하여
※루소에 따르면 반성적 자기를 가지게 된 인간의 불행에 대하여・・・
「반성적 자기의식이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자신의 존재를 의식화하는 데 이른 의식의 존재방식이다. …즉 무한히 「밖」으로 향하여 확장해 가려는 자신이 「안」으로 「반사reflechir」되는 것으로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반성reflechir」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반성적 자기의식이 「이성」의 싹을 틔운다. /「이성」이 각성되어 「자/타」의 구별을 하려고 하게 된 인간은 이미 제1장에서 본 바대로 「자신이라는 것」과 「타자라는 것」을 구별하고 전자를 보다 확장하려 한다. 그렇게 하여 주위의 사물에 대한 「소유=자기고유성propriete」개념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고정화하기 위하여 「사회」가 조직된다. 「사회」라는 것은 자기 소유를 확보하려는 각인의 에고이즘의 산물이며 그를 위해 규정이 있다. 규정을 깨는 것이 「악」이다. 」88-89
→따라서, 선악을 알지 못하는 갓난아기가 행복한 것이다, 라고 강조.

「루소는 이러한 「자연인」으로서의 순진무구함을 억압해 버린, 강요적인 사회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자연적인 본성을 가능한한 살리는 이상적인 교육의 책으로서 『에밀』(1762)을 썼다.」89-90

계약하는 자유로운 자연인 90 ※루소의 또 하나의(한 명의) 「자연인」과는 상이한 이상적 인간유형에 대하여
「루소의 저작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이상적인 사회의 통합원리를 정식화한 『사회계약론』(1761)이다. 제목인 「사회계약」론이라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영국 교회를 통해 부여된 신적 권위에 의해 왕권을 근거지우는 것이 곤란하게 된 근대적 상황에 있어서, 「국가」에 의한 주권의 정당성을 새롭게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이론이다. 여기서 대전제가 되는 것은 각인이 「자연인」으로서 얻어낸「자유」를 「국가」에 의한 지배와 양립시킨다는 명제이다. 즉 「신」을 끄집어내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립한 주체가 강제에 의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주권의 형성에 합의한다는 논리구성이 필요하게 된 셈이다. 」90-91
→홉스, 로크「자연상태」가설
→홉스:「리바이던=국가」92

→루소는 로크, 홉스적인 「자유」제약론을 비판한 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그러한 홉스 로크적인 「자유」제약론을 비판한 뒤에 각인의 「자유」의 추구를 실제의 의미에서 조화시키는 「사회」의 존재방식을 이념적으로 제시하려 한 것이다. 」93
「그렇다면 자신의 「자유」를 타자에 이전시킬수 없다면 어떻게 「계약」을 체결하면좋을까 라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루소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자기자신의 자유와 관련된 기본적인 제 권리를 자기 자신이 받아안고 사람으로서 양도하면 된다라는 답변이다. /・・・「우리들」모두이다. ・・・」94
 →인민주권론, 국민주권론이라 불린다

근대법을 지탱하는 「일반의지」96 ※인민주권론을 지탱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루소가 생각해낸 것이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우리들」의 의지인 「일반의지」이다. …그 「일반의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이다. 일반의지를 담아 넣은 「법」에 따르는 것은 타인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96

→「일반의지」는「전체의지」와는 상이하다.

 「일반의지」의 표상가능성99 ※루소「일반의사」의 이미지하기 어려움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어떤 인물이「개별이해」를 넘어선 중립적인 필자라는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100

 「교양」소설의 양의성105
 스로터다이그의 「연쇄서간」론108 ※에쿠리츄얼의 연쇄에 대하여
 「인간성」의 종언112

제3장 교육의 「자유」의 부자유

 「인간성」교육으로서의 「살아갈 힘」론118 ※교육에서의 「주체성」론의 문제에 대하여
※루소적인 인간관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교육」「교육학」에서의 주체성론에 대하여
「물론, 이러한 “주체성”중시론이 나오게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시대적 배경이 있다. 편차식 중시의 「구겨넣기식 교육」노선의 시정이 70년대부터 계속 호소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교육」의 목표를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되어온 것은 확실하다. 그 때에 「외부」로부터 「지식」을 구겨넣는다는 종래의 방식과는 반대로 「내부」에서 나타난 「주체성」을 중시한다는 발상이 강화된 것은 일정정도 납득할 수 있다.그러나 문제인 것은 「구겨넣기식」과 「주체성」을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해 버려서 「구겨넣는 식」을 줄이면 「주체성」이 “자연”적으로 부상하게 될 것 같은 전제로 「주체성」교육론을 만들어내 버린 것이다. 」120

「・・・그렇게 “전체”로 해 버리기 전에 원래 「주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설정해놓지 않으면 「주체성=구겨넣기 식이 아님=방임」이라는 안이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은 처음부터 명확한 것이다. ・・・「주체성」이란 타자로부터 간석받지 않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일정한 제도적 구조 안에서의 「타자」로부터의 「작용」이 없는 한 형성되지 않는 것인가를 제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20-121

「이미 루소 등의 사회계약론에 근거하여 보아온 바대로 「주체Subject」가 된다고 하는 것은 동시에 특정 공공적 질서「~에 따른다~be subject to」라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히 「무」속에서 「주체성」이라는 것이 갑자기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문맥(컨텍스트) 속에서 만이 「주체」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은 현대 사상에서 꽤 상식적으로 되어 있다는 논의이다. 」121

 「여유(유도리:ゆとり)」로부터「주체성」은 태어나는가?122 ※「여유(ゆとり)」교육의 「단락」에 대하여
 「여유」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학교127
※유도리「성역」이 되고 만「학교」, 그것을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여유」교육추진자
「자연아(自然児)」교육의 전략132 ※루소「에밀」과 일본의 학교교육의 어울리지 않음
국가측의 「주체성」교육135 ※「자연스러운 주체성」이라는 언설의,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위험함
 왼편의 자연주의141  ※「왼」쪽의, 리버럴리즘도「공동체」적
「・・・그러나, 아무리 자기결정에 근거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보아온 바대로, 그러한 “자기결정” 자체가 완전히 「무」에서 갑자기 “자연”발생저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가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 자유」에 합의한 행위는 생득적인 것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의 토론을 거쳐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이다.」144

 오른쪽의 자연주의146 
 「자유주의사관」의 부자유150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19세기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에 반발하는 형태로 생겨난사상이다. 」150-151
※「자유주의사관」이라는 언어표현의 이중의 모순153
 →①자학사관에서의 탈각이라는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에 맞는 문맥으로 역사를말한다는 발상자체가 서구의 산물이다.
 →②「애국심」적인 문맥으로 유도하려한다.

 「살아있던 언어」를 되살리다153
※「죽어」있는 에그리츄얼로부터「생생한 언어」를 끄집어 내려 하는 자유주의사관의모순
 「자연적인 인간성」의「기법」화158 ※「자연체」는 실제로 이미 어떤 에크리츄얼에의한「형태」에 맞추어져 있다.

제4장 「성급한 인간」은 그만두자
 
 주류파로서의「리버럴리즘」166 ※존 롤즈「무지의 베일」
「1990년대까지의 현대사상 중심점은 확실히 프랑스에 있었다. 왜냐하면 현대사상이란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사상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명백하게 미국으로 움직이고 있다. 포스트 콜로니아즘과 같이, 원래 반서구적 성격도 포함하여 현대사상의 메인 스트림이 되고 있는 것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166
「그러한 미국 사상의 최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 또는 “형성했었던” 것이 존 롤즈(1921-2002)가 개척한 「리버럴리즘」의 사상일 것이다. 」166

협공당하는 보편주의170 ※「리버타리어니즘」과「커뮤니타리아즘」
「「리버리터리어니즘」이란, 롤즈의「공정으로서의 정의」도 포함하여 국가나 공동체가재분배를 행하는 것을 가능한 회피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의 여지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이론화는「최소한국가」론을 정식화한 로버트 노직이다.」170

「이에 반해, 커뮤니터리아니즘은 개인의 자유 존중보다도 “개인”을 형성하는 공동체적인 문맥들이나 역사적으로 배양되어온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는 입장인 「공동체」라는 부분을 제외한 「개인의 자유」그 자체에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라 말해도 좋다. 」170-171
 →마이켈 월쳐, 찰스 테일러 등

 포스트 보편주의의 문제173 ※「보편성」을 취급하는 것에 의한 「경계선」의 불명확함

 「개인」과「공동체」의 경계선178 ※사회적 아이덴티티가 있는 한 공동체 구속은 이루어지고 있다
「즉 아무리 소수파 중에서도 「소수파 속의 소수파」는 반드시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무리하게 「소수파의 공동체」에 “들여보내주면” 오히려 부자유롭게 되는 경우가 있다, 라는 것이다. ・・・」178-179

「원래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격을 주변으로부터 강제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하며, 보다 세분화된 「차이」의 표상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179

「그렇다면 그러한 미니 「공동체」적인 것에 계속 유지하기 보다는, 완전히 개인단위에서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라고 리버리터리안은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180
 →리버터리안도 「공동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모리무라(森村)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노우에(井上)는 그것은 국가로 이어진다, 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중요)아이덴티티와 이마지널한 영역에 대한 권리182 ※코넬의 「이마지널한 영역에대한 권리」
※「개인」과「공동체」에 대하여
「・・・우리들의「아이덴티티」의 기반이 되고 있는 「공동체적인 것」이 다양한 수준에서다원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게다가 그러한 것이 상호적으로 복합하게 얽혀 있으므로, 어떻게 해도 끊을 수 없는 형태로, 사회적 「정의」에 대하여 논할 수 없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동체」별로의 「정의」에 한정하여 논의하려 하더라도 이번에는 “공동체”의 범위확정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된다.」182

「「자기결정」이라는 경우의 “자기”가 무엇인가가 원래 확실히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스스로는 자립하여 있다고 여기지만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다양한 사정으로 「타자」들과 복잡하게 공동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어떠한 맥락에서 「나」인가에 의해 「자기」의 성질이 상이해지는 것이다. 」182

→「・・・미국의 페미니즘계 철학자 도르시라 코넬(1950-)이 제안하고 있는 것이 「이마지널인 영역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imaginary domain)」라는 권리 개념이다. 」183

「「이마지널한 영역」이라는 것은 라캉계 정신분석에서 「사상계」라 불리는 것에 대응하는 것이며 간단히 말하자면 「타자」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타자」들을 「거울」로 하면서 「자기」가 형성되어 가는 영역이다.」183
→「거울」→성인들의 단어, 행덩거지, 타자들이 지니고 있는 공동체적 요소, 특정 젠더,언어, 에스니시티

「우리들은 통상 그러한 자기를 상상하는 프로세스는 성인이 된 시점에서 이미 완결되어 있으며, 우리들의 아딘테테(자기동일성)은 움직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쉽다. 리버리즘이나 리버터리어니즘에서 「자기결정」의 경우에 전제가 되는 「자기」는 통상 그렇게 움직이기 어려운 「자신」을 지칭한다. ・・・사람은 강제로부터 “자유”롭게만 된다면, 그 경우 「스스로」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 라는 것이 근대적 자유주의의 대전제이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들」은 그때까지의 공동체적 문맥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판단할 수는 없다. 」184

→예:이성애자는 자신은 정말 동성애자일 지 모른다는 느낌에 다달했다고 가정・・・
「지금까지 이성애자로서「자기」를 규정(identify)해온 사람이 있다 한다면 동성애자로서의 “자기”모델이 되는 제1차적 타자와의 관계를 결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이미 존재하는 특정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이와는 상반되는 “아이덴티티”를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갑자기 형성할 수는 없다. 원래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조차 곤란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한 사람으로 무리하게 이미지하려 하더라도 관념적이며 현실미 없이 이미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로서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는 부정확한 것이므로 좀처럼 「자기」결정할 수 없게 된다. 어떠한 것이 정말로 「자신다움」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185
 →국적, 에스니시티, 종교, 혹은 「학교 공동체」(학교), 직업공동체, 지역공동체・・・
 →통상적인 리버럴리즘은 「마음」의 문제에 잠입해 들어가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 되며 본인의 「주체성」에 맡겨버린다.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카운셀링의 영역이며 근대법 영역이지 않다.

「요컨데, 리버럴리즘이나 리버터리어니즘에서도 「자기결정」에 앞서는 “자기”의 선택 문제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공동체적 문맥에 맡겨지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자신」을 선택하는 가는 해당인과 해당인을 둘러싼 다양한 공동체적 문맥과의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어 가는 것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형태에 대해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이마지널한 영역을 함께 형성하고 있는) 「타자」의 도움이 없으므로 현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186

 「자기」결정을 위한 「권리」187 
※「이마지널한 영역에 대한 권리」에 대하여. 자기결정을 하는 「자기」의 재「자기동일화작용」의 「법」적, 「정치」적 권리에 대하여.
「「이마지널한 영역에 대한 권리」는,「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을 획득하기 위한(메타) 권리로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권리」인 이상, 단지 주관적으로 상정되는 것이 아닌 법적, 정치적으로 객관적인 형식을 갖추게 될 필요가 있다. 」187

「당연히 이러한 논의의 전제로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한번 형성되어 버리면 바뀌지않는 것이 아닌, 항상 생ㅇ성되고 있는 것이 상정된다.」188

「코넬이 지금까지 리버럴리즘에서 고찰의 범위 외에 놓여져 있던 「마음 속의 문제」인 「이마지널한 영역」을 전면에 내게 된 배경에는 본인이 그렇게 바라지 않는 네거티브 아이덴티티가 언제부터 인지 “자유”로운 「자기결정」의 기반이 되어 있거나 「집단적 자기주장」의 근거가 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
→유아학대의 체험, 여성의 인권이 반드시 존중되지는 않는 문화적 공동체

「「이마이지널한 영역」의 「자유」로운「자기」(재)상상의 권리가 보호되지 않는 한정치나경제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주체성」에 근거한 「자기결정」은, 실제의 의미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라는 것이 코넬 논의의 골자이다.」190
「그녀는 스스로의 입장을 아이덴티피케이션에 대한 정신분석적 견지에 근거하여 전통적인 칸트적 리버럴리즘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는 것으로 위치짓고 있다.」190

 →어떠한「자기」로서의「자기결정」을 행하는가

 「자기」결정론과「아마지널한 영역」191
※(특히 의료 분야에서는)「이마지널한 영역」의 경계선, 「자기」의 존재방식 자체를둘러싼 재상상, 의 과제. 그것을 하지 않으면 「자기」결정은 할 수 없다.
「이러한 논의는 그렇게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느끼지 않는 “보통의 사람”이 일상의 다양한 장면에서 조우하는 「자기결정」에도 해당한다, 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191→※대부분의 경우 공동체적 문맥으로 인해 바깥 해자가 메워진다.


「물론, 태어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위의 「타자」를 「거울」로 삼으면서「자기」형성(아이덴티피케이션)해 온 것이므로, 그러한 것들 모두의 공동체적 문맥에서 전혀 「자유」롭게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승인한 이후, 구태여 “자기결정”이라고 말하는 이상, 어떠한 장면에서의 「자기」가 문제시되는 가 「상황설정」을 가능한한 명확히 한 이후, 그러한 “자기”를 구속하고 있는 주어진 관계성을 다시 파악할 기회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192

→※환자의 자기결정권, 인폼 컨센트

「철학적으로 보아 좋은 곤란함은 원래 「어떠한 정보를 환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인가」「무엇을 설명해야 하는 가」확실히 확정할 수 없을 것 같은 경우, 환언하면 「자기결정」해야 할 「상황」을 명확히 설정할 수 없는 경우이다.」194
「본인의「남겨진 여생」을 어떠한 형태로 나타내는 가, 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없다.심각한 병이라면 치료의 결과, 부작용으로 몸이 허해진다던지 신체기능 일부를 잃거나 그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이미지」가 변경될 수 밖에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인생의 이미지까지 좋든 싫든 변화시켜 버릴 가능성도 있다.」194

「문제인 것은 그러한「자기」의 존재방식을 둘러싼 재상상이 필요하게 되고 있는 것은좀처럼 의식화되지 않는 법이다. 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마치 의사로부터 객관적인 정보만 제공된다면 이미 확정되어 있는 환자의 「자신」에 의해 주체적인 「결정」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소박한 「자기결정론」이 만연하고 있다.」195

 자기결정론과 효율성195 ※효율성과 자기결정의 친화성
「「결정」하기에 앞서 하나하나 「자신」을 재구상하자면 시간이 걸린다. ・・・」195
「전문적인 경험이 풍부한 전자(전문가-발췌자 주)가 후자가 되며 대신하여 그 이익을대행하는 형태로 결정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문맥에서 「설명책임accountability」가 소리 높게 부르짖어지고 있는 현상에서는 후자에게 「책임」의 대부분을 지워버릴 수 있는 「자기책임」(→「자기결정」?)의 편이 전자에게는 온정주의보다도 “편리”하다.」196

「효율성을 중시하는「신자유주의」의 경제사상과「자기결정」론과는 친화성이 있는 것이다. 」196

「몇 번이나 말하려는 것이나,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 가 잘 모른다면 무엇을 자기결정이라 하는 것이 좋은 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199

 성급한「주체성」199 ※
「정신분석적 관점에서의 근대가족사 연구가인 에리 자렛은 「자기결정」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주체성」은 실제로는 서구인의 「성급함short-temperedness」의 표현이다 라고 재미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199
「이것은 우리들이 막연하게 「주체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의 정체를 매우 훌륭하게 적중시킨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서술한 바대로 「자기」를 둘러싼 제 관계성의 네트워크를 시야에 넣고 「판단」시의 선택지에 의해 이들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 가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좀처러 「자신만이」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히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200
「・・・「타자」를 「거울」로 하지 않으면, 「자신」을 최종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200

「그러나, 그러한 「자기」를 둘러싼 관계성에 대한 복잡한 사고의 흐름은 회전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인 생산체제에 관통되어 있는 「근대」에 있어서 경시되기 쉬운 것이다. 오히려 걸림돌이다.」201

「근대적인「주체성」은, 그렇게 성급하게 단축된 관계성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주체」는 명목상으로는 타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 자기결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배경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해 하나하나 생각지 않고 재빠르게 “자기결정”하도록」강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라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는 매우 “부자유”스러운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201-202

비주체적인 주체로서의 멀티튜드202 ※멀티튜드에 대한 기대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제국>』으로 유명하게 된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1933-)은 전통적인 「혁명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대신에 세계를 변화시켜 갈 운동의 담당체로서 「멀티튜드multitude」라 이름붙이고 있다. 「멀티튜드」라는 것은 원래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용어로 (신적영감에 이끌려(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잡다한 「군집」을 지칭한다. 」203

「・・・「자기」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성 속에서 네거티브한 「아이덴티티」로부터 가능한한해방된, 표면적으로는 “주체성”만을 변화시키려고 잘 되지 않는다. 다른 형태의 「자기결정」론이 나올 뿐이다./ 자금, 현대사상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자유로운 자기결정」또는 「비주체적인 주체성」에 대한 강제로부터의 “자유”에 대하여 제대로 사고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닐까.」206

 「자기」의 상황한정207 ※
「지금까지,「자유로운 주체」가 되도록 강제되어온 것의 “부자유함”에 대해 비판적으로논의해왔다. 마지막으로 「’강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등의 결론을 무리하게 제시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까지의 모순을 반복할 뿐이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자유주의적인 「자기결정」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 한다면 「부의 자기결정론」으로 표면적으로 전환하는 것 만으로 중요한 것은 거의 변화되지 않는다.」207

「문제인 것은 마치, 공동체적 문맥을 뺀 「자기결정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과같은 담론이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가운데, 어떠한 「상황」인 것인가 라는 상정을 뺀 “자기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207


*작성:히자와(樋澤)
UP: 20140120 REV: 20151022

TOP HOME (http://www.arsv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