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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를 중심으로――」

윤삼호 20130322 『장애학국제세미나2012――한국과 일본의 장애와 병을 둘러싼 논의』,생존학연구센터보고20,pp.155-72.
[Japanese]

last update: 20131022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를 중심으로――」


윤삼호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정책위원)


Ⅰ. 글을 시작하며

마이클 올리버는 장애인 단체를 등장 순서에 따라 단계로 유형화한다1) 정부기관과의 파트너십에 기반하여 장애인들을 지원하는 후원/자선단체가 맨 먼저 생긴다. 그 다음 장애인의 경제적 문제와 관련하여 의회를 설득하는 로비단체가 등장한다. 이런 단체는 대부분 비장애인들이 조직하고 통제하는 ‘장애인을 위한 단체(organizations for the disabled)’다. 그 뒤 1970년대 초부터 소비자주의에 기반한 장애인 자조단체들이 등장한다. 이어서 민중주의에 기반한 활동가 조직들이 나타나고, 최종적으로는 소비자주의 및 민중주의 조직들이 연대한 우산조직이 등장한다. 올리버는 자조단체 단계부터는 ‘장애인 당사자 단체(organizations of the disabled)’로 분류하고 이런 단체들이 장애운동을 신사회운동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장애운동의 경우는 서구와 달리 1980년대 중반 민중주의 지향이 강한 청년장애운동 조직이 먼저 결성되고 10년쯤 지나 우산조직을 지향하는 단체(한국 DPI)가 등장한다. 그리고 자립생활센터 등 소비자주의 들은 2000년 이후에야 나타난다. 이같은 발전 양상은 한국 장애운동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소수자 운동의 맥락에서 출발한 서구의 장애운동과 달리 한국 장애운동은 1980년대 비장애인-민중운동의 영향 아래 시작된 까닭에 ‘처음부터’ ‘장애-민중주의’ 전통이 강했던 것이다.

한국의 민중운동이 이른바 PD(민중민주파)-NL(민족해방파) 대립의 역사였다면, 장애운동은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장애민중주의’란 장애운동을 민중해방운동의 한갈래로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실천하는 이념을 아우르는 ‘잠정적’ 개념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단체에는 노들장애인야학, 전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소속 자립생활센터들, 장애여성공감, 전국장애인부모회 등이 있고, 이들은 2007년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로 결집했다. 이 연대체에는 장애인 단체뿐 아니라 (구)민주노동당, (구)진보신당, 사회당, 행동하는의사회, 전교조 등도 참여하고 있다.

한편, ‘장애당사자주의’는 장애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개입에 저항하며 장애운동의 이론, 실천, 조직을 장애인 스스로 판단•결정•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애인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 환경과 서비스 공급체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비판•견제함으로써 장애인의 권한과 선택 및 평가가 중시되는장애인 복지를 추구하며, 그 결과 장애인의 권리, 통합과 독립, 그리고 자조와 자기결정을 달성하려는 장애인 당사자 주도의 발전된 권리운동”이다.2) 당사자주의를 내건 단체로는 한국DPI,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소속 자립생활센터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장애여성네트워크, 한국정신장장애인협회, 한국지체장애인협회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와 한국DPI를 중심으로 연대하고 있다.

한국 장애운동에서 장애-민중주의 그룹과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은 그 뿌리가 동일했음에도 1990년 말엽부터 지금까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 이 글은 위의 두 그룹이 등장하고 발전해 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한국장애운동사를 정리하고, 최근 장애운동의 위기적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끝맺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 장애운동사를 총평하고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더 많은 논쟁을 위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Ⅱ. 한국 장애운동 역사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지난 25년 간 장애운동가들은 쉼 없이 저항하고 조직하고 연대했다. 투쟁 열의에 비해 운동 자원과 경험이 부족하여 많은 시련과 불화를 겪었지만, 장애운동은 꿋꿋이 살아남아 2000년대 이후 화려한 꽃을 피웠다.

1. 청년장애운동 시대(1986년~1998년) - 장애-민중주의의 등장과 투쟁

1980년 초반까지는 한국에서 조직적인 장애운동이 거의 없었다.장애 유형별 장애인단체들이 일부 있었지만 그들은 이익집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 대학, 병원, 장애인 시설 등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동아리나 동문회 조직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고, 1978년에는 장애 대학생 동아리들이 연대하여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이하 ‘전지대련’)를 만들지만 이 조직은 운동단체라기보다 친목단체에 가까웠다.3)

이런 수준을 뛰어넘어 본격적인 장애운동 조직이 등장한 시기는 1986년이었다. 그해 서울에서는 울림터와 한국DPI(한국장애인연맹)가 출범하는 데, 이것은 이동권 투쟁 이전의 한국장애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록될 부분이다. 울림터는 정립회관 고등부 동아리 ‘밀알’ 출신 대학생 10여명4)이 주동이 되어 만든 작은 조직이지만, 기존 장애인 단체들과 달리 운동 조직의 구성과 면모를 갖춘다. 특히 기관지 <함성>을 통해 장애 문제의 원인은 개인이 아닌 자본주의적 모순 때문이라고 제기하는 등, 당시로는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들을 연이어 내놓는다.5) 따지고 보면 <함성>의 주장은 독창적인 장애이론이라기보다 당시 민중운동의 논리를 장애운동에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뿐인데, 이것이 장애-민중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 담론의 신봉자들이 적지 않다.

1987년 울림터는 장애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전지대련에 가입하고 이 조직을 이념적, 실천적으로 주도하려고 하지만, 이들의 ‘급진적 관념’과 다른 소속 단체 구성원들의 ‘가족적 성향’이 쉽게 융화되지 않는다. 장애대중운동을 이끌 리더십의 한계가 드러나고 조직 내 불화까지 겹치면서, 결국 울림터는 1992년 해산된다.

해산 뒤 울림터 구성원 대부분은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이하 ‘장청’)에 가입한다. 장청은 1988~89년 장애인올림픽거부 투쟁과 장애인복지법 개정 및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투쟁을 주도한 수도권 장애청년들이1991년에 결성한 조직이다. 장청은 출범선언문에서 “억압받고 소외받는400만 장애민중의 생존권 쟁취를 위해 투쟁할 것이며, 이를 통해 민중이 주인된 새 세상 건설을 목적으로 투쟁하는 제 민족민주세력과 연대하여 장애해방의 깃발을 반역적, 반민중적 집단과 투쟁하는 전선이면 그 어느 곳이든 가열 차게 휘날릴 것이다”6) 고 밝히는 등 장애-민중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장청 역시 소수 운동가들에 의한 선도투쟁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목표로 삼았던 전국 장애인청년조직 건설에 실패하고, 설립 2년 만에 다른 대중 조직과 통합을 모색한다.

이번에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전장협’)가 통합대상이었다. 1991년에 결성된 전장협 역시 친목회 수준의 조직이었지만 전지대련보다는 조직력이 강했다. 전장협은 전지대련처럼 여러 동아리들이 연합한 조직이 아니라 소아마비 치료시설인 여수 애향병원 출신자들의 모임 ‘밀알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장애-민중주의 관점을 가진 장청과 전국 조직망을 갖춘 전장협이 통합되면서, 전장협의 장애청년 운동가들이 1998년까지 한국 장애운동의 주축이 된다.

장애 청년 운동가들은 1980~90년대 장애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다. 이들은 장애자올림픽거부투쟁(1988년),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및 장애인복지법 개정 투쟁, 즉 ‘양대법안투쟁’(1989년), 정립회관 비리 투쟁(1990년, 1993년)7), 최정환 열사 분신 투쟁(1995년)8), 이덕인 열사 의문사 투쟁(1995년)9) 등 숱한 대중투쟁 현장에서 때론 단독으로 때론 민중운동과 연대하여 치열하게 투쟁한다.

당시 청년 장애운동가들은 거리 집회를 통해 장애인들의 요구를 알리는 한편, 주요 고비에서는 ‘점거 투쟁’을 적극 활용하였다. 장애자올림픽에 기부한다며 연동교회를 점거하고, 양대법안 투쟁 때에는 삼육재활원, 장애자올림픽조직위원회, 공화당사, 야당 당사를 돌아가면서 점거한다. 또 시설 비리와 관련하여 1989년에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그리고 1990년과 1993년에 두 차례 정립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다. 이 같은 점거전술은 2001년 이후 이동권 투쟁에 고스란히 계승된다. 일정한 공간을 점거하고 자신의 주장을 제기하는 전술이야말로 기동력에 의존할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아주 효과적인 투쟁 수단일 것이다.

청년 장애운동가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노동권, 생존권 등 포괄적인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는 조금씩 일상 삶의 문제에 눈을 돌린다. 전장협 대전지부는 1996년에 이동편의권 투쟁을 통해 대전시장으로부터 모든 대전지하철 역사에 승강기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또 1997년 서울에서는 전장협,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모임, 뇌성마비연구회가 ‘장애인교통권확보를위한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저상버스(또는 리프트 장착 버스) 도입을 요구한다.10) 당시 장애인들이 외쳤던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는 2000년대 이동권연대의 주요 슬로건이 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울림터, 장청, 전장협으로 이어지는 청년 장애운동 조직들, 그리고 장애-민중주의 성향이 강한 장애청년운동가들이 1980~90년대 한국 장애운동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청년장애운동 시대’라고 정의해도 무방할 것이다.

2. 장애운동의 분화(1999년~2007년)
-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의 대립

치열하던 장애청년운동은 1995년 이덕인 의문사 투쟁 이후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점거 농성은 사라지고 대중교통이용권, 참정권, 노동권 등을 청원하는 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활동가들은 하나둘씩 이탈하고, 투쟁의 열기는 식어가고, 새로운 전망은 요원했다. 결국 전장협은 또 한 번 통합을 통해 난관을 돌파하려고 했다. 이번에는 한국 DPI가 그 대상이었다.

○전장협과 한국DPI의 통합
- 청년 장애운동 시대의 마감

한국DPI는 1980년 RI 총회에 참석하여 국제 장애운동을 직접 목격한 송영욱 변호사(당시 한국소아마비협회 이사)를 중심으로 1986년 설립된다. DPI 정신에 따라 각 장애 유형을 대표할만한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등 2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초기 DPI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층 장애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대중운동보다 소수 엘리트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점, 그리고 국내 문제보다 국제 연대에 주력하였다는 점에서 그 당시 청년장애운동과 맥락이 달랐다. 바로 이런 시점에 장애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던 전장협과 국내 문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한국DPI가 만나 1998년 10월 20일 통합을 결의한다.

전장협-한국DPI 통합은 1993년 장청-전장협 통합과 정반대 방식으로 진행된다. 청년장애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전자가 대중 투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통합이라면 후자는 장애운동의 이념성과 국제 연대를 위한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시 청년장애운동은 그동안 견지하던 장애-민중주의 대신 한국DPI의 장애-당사자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하여 1980~90년대 한국 장애운동을 주도한 청년장애운동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당연히 통합 과정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통합을 주도한 울림터 출신자들과 조직 구성 방식, 운동 노선 등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전장협 부설 기관인)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 등 일부 활동가들이 통합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다. 게다가 전장협 지역 조직 8곳 가운데 광주, 울산, 강원도, 대전 지부가 통합에 합류하지 못한다.11) 바야흐로 장애청년운동과 국제 장애운동이 한 배를 탔으나 ‘불안한’ 출발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DPI에 통합된 그룹과 이탈한 그룹은 각자의 길을 가다가 2년 뒤 마침내 이동권 투쟁 현장에서 만난다.

○이동권 투쟁의 전개 과정

2001년 1월 22일, 수도권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고재영(74세) 박소엽(72세. 지체장애 3급)씨 부부가 역사 내 리프트를 타고 가다가 7m 아래로 추락한다. 이 사고로 남편은 중상을 입고 아내는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한국 장애운동의 흐름이 급선회한다. 사건 직후 서울DPI,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서울지체장애인협회, 장애인실업자연대,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는 ‘오이도역장애인수직형리프트추락참사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철도청, 보건복지부, 산업자원부 항의 방문을 시작으로 투쟁에 들어갔다. 2월 6일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1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규탄 집회를 개최한 다음 장애인 수십명이 지하철 서울역 철로에 뛰어들어 약30분 동안 점거한다. 이렇듯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또 격렬하게 폭발하였다.

오이도대책위는 그해 4월 20일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하 ‘이동권연대’)’로 바뀐다. 서울지체장애인협회가 빠진 대신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민중복지연대등이 새로 참가했다. 참가단체는 꾸준히 늘어 이동권 투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2005년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민중연대, 민주노동당, 희망사회당, 행동하는의사회 등 35곳으로 늘어난다.

이동권 투쟁은 크게 이동권 법률 제정 운동과 직접행동으로 전개된다. 직접행동의 핵심 전술은 ‘점거’와 ‘천막 농성’이었다. 2001년 3월부터 장애인과 함께 지하철 타기 운동이 시작되고, 7월부터 시작된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 행사는 2005년 1월까지 모두 41차례 진행된다. 특히, 2001년 8월에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시내버스를 4시간 동안 점거하다가 시위대 85명이 경찰에 연행된다. 당시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은 1970년대 미국 장애인들처럼 버스 안에서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는데, 그 뒤 쇠사슬은 장애인의 억압과 저항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2001년 7월 1차 버스타기 행사가 끝나고 시위대는 서울시청으로 몰려가 천막 농성에 들어간다. 일주일 동안 세 차례 천막을 철거당하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 45명이 연행된다. 결국 장소를 서울역 광장으로 옮겨 천막농성을 계속하다가 한 달 뒤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된다. 2002년 5월 서울 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 중증 지체장애인이 리프트 추락 사고로 또 사망하자, 이동권연대는 5호선 광화문역사에서 무기한 천막 농성에 들어간다. 9월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철로를 약1시간 동안 점거하다가 76명이 연행된다. 그러던 중 2003년 5월 수도권 국철 송내역에서 시각장애인이 선로에 추락하여 사망한다. 이번에도 이동권연대 소속 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단체와 함께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여 항의한다. 그리고 10월부터는 이동보장 법률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68일 동안 천막 농성을 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 한나라당사, 서울시청, 정부기관 행사장을 점거하고 영등포로터리와 마포대교를 비롯하여 서울 시내 차도 곳곳을 점거한다.

이동권연대는 현장투쟁과 더불어 법률 제정 운동도 전개한다. 2001년 6월부터 이동권 확보를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여 2004년 12월까지 약 55만여 명의 서명지를 국회에 전달한다. 또 2002년 10월에는 ‘장애인•노인•임산부등의교통수단이용및이동보장에관한법률(이하‘이동보장법’)’ 입법 투쟁을 선언하고 2003년 초부터 전국 순회 간담회를 조직하고 공동대책위를 구성한다. 마침내 2004년 7월 국회의원 16인이 이동보장법을 공동 발의하자, 정부는 11월에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결국, 정부 법안을 토대로 그해 12월31일 이동편의증진법이 만장일치로 국회에서 통과된다.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됨에 따라 ‘이동권’12)이 법적 권리로 정의되고, 정부는 5년마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계획을 수립해야 하고, 지방자치단체는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이른바 ‘장애인 콜택시’)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또 전국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이동권 투쟁
- 한국 장애운동의 변곡점

이동권 투쟁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한국 장애운동의 변곡점으로 평가할만하다.

첫째, 이동권 투쟁을 거치면서 장애운동의 선봉이 고학력-경증-소아마비인에서 저학력-중증-뇌성마바인으로 교체되었다.

당시만 해도 비가시적인 존재였던 중증 장애인들은 가족과 함께 살더라도 집밖 출입조차 어려웠고 상당수는 시설에 수용되어 사회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중증 장애인들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 관계를 맺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야학과 자립생활운동이었다. 당시 노들야학(서울), 질라라비야학(대구) 등 장애인 야학이 약10여 곳에 있었는데, 그곳은 중증 장애인들과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상호 의식화되는 공간이었다. “장애인 야학을 찾는 이들은 학습을 통해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켜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삶을 억압하고 있는 세상과의 소통 방식으로 삶이 곧 운동이 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점차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13) 또 당시 막 시작된 자립생활운동에서 배출된 중증 장애인 활동가들도 이동권 투쟁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의식화된 중증 장애인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장애운동의 상징도 ‘목발’에서 ‘휠체어’로 바뀌었다.14)

둘째, 이동권 투쟁을 통해 장애운동과 비장애인-민중운동의 연대가 더 강고해졌다.

이동권 투쟁에는 많은 비장애인 청년들도 참여하였다. 자신의 존재 기반을 뛰어넘어 투쟁에 동참한 비장애인들은 특수교육 전공 대학생, 장애인야학 교사, 학생운동가, 진보정당 활동가 등 그 구성이 다양했다. 이들은 중증 장애인들의 활동보조 같은 개인적 지원은 물론이고 선전물 배포, 몸싸움 등 직접 투쟁에도 가담하다 구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당,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투쟁을 지원하였다. 일부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투쟁 지원에 그치지 않고 투쟁을 기획하고 주도하거나 ‘프락션’을 하기도 했다. 이들을 매개로 상당수 장애인들이 진보정당들의 장애인위원회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장애-비장애 운동가들의 연대는 어디까지나 외형적 통합일 뿐 일상의 삶 속에서 동지적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또 주류운동과 연대가 강화되면서 장애운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오늘날 장애운동은 비장애인 운동가와 똑같은 어투로 구호를 외치고 사회를 보고, 똑같은 논리로 국가를 비판한다. 장애-민중주의 그룹에 국한해서 보면,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여타 민중 세력이 종적으로 연대하는 구사회 운동적 기획이 인종, 여성, 소수자 등 다양한 운동세력이 횡적으로 연대하는 신사회운동적 기획을 (아직까지는) 압도하는 양상이다.

셋째, 이동권 투쟁을 거치면서 한국 장애운동은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동권 투쟁이 한창일 때, 장애-당사자주의라는 새로운 노선을 채택한 한국DPI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볼 때) 투쟁 방식과 연대기구 운영 방식을 놓고 장애-민중주의 그룹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이동권연대를 탈퇴한다. 1980~90년대 청년장애운동을 주도하고 제1차 지하철 선로점거 때 가장 많은 연행자를 배출했던 한국DPI 활동가들이 탈퇴하면서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의 분리가 가속화되었다.

이동권연대를 탈퇴한 한국DPI는 2003년 12월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와 서울•제주•양천•상화자립생활센터 등과 함께 중증장애인전동휠체어국민건강보험확충적용추진연대(이하 ‘전동연대’)를 결성하고 ‘전동 휠체어 보험 적용 투쟁’에 전념한다. 전동연대는 전동휠체어 의료급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집회, 공청회, 기자회견 등 다양한 압력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을 전개한다. 특히, 2004년 11월에는 소속 단체 장애인 29명이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의 로비와 이사장실을 점거하고 하루 만에 전원 연행된다. 이처럼 한국DPI는 이동권연대에서 탈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전재한 셈이다.

전동연대의 투쟁의 결과, 2005년 4월 보건복지부는 중증 장애인이 전동휠체어와 전동스쿠터를 구입할 경우 각각 209백만원과 167만원까지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의료급여법 개정안을 공포한다. 이로써 중증 장애인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전동휠체어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이들의 이동 속도와 범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동권연대 내부의 갈등과 이어진 탈퇴, 독자 투쟁의 전개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가 서서히 분화되더니, 마침내 정립회관 사건을 거치면서 두 그룹은 완전히 갈라선다.

○정립회관 사건
-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의 단절

한국소아마비협회가 운영하는 정립회관은 1975년 10월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장애인 이용시설이다. 정립회관은 설립 초기부터 예능경연, 웅변대회, 체육대회, 방학 캠프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청소년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특히 장애 학생 체능검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당시 장애 청소년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학교와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배제되던 시절, 장애 청소년들에게 정립회관은 육체와 영혼의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그곳은 단순한 장애인 시설이 아니라 운동 공간이자, 놀이 공간이자, 사교 공간이자, 토론 공간이었다. 또 시설 내 수영장에서 ‘왜소하고 뒤틀린’ 벗은 몸들을 마주보면서 장애인으로서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집단화와 동질화의 경험을 한 장애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한 가족’이 되었다. 정립회관 출신 10여명으로 출발한 울림터가 그 후 폭풍 같은 청년장애운동 시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04년, 바로 이곳 정립회관에서 장애-민중주의 그룹과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이 맞붙는다. 이동권 투쟁 당시에도 두 그룹은 갈등을 빚었지만 그때는 한 쪽이 이탈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이번에는 장애운동을 바라보는 관점뿐 아니라 ‘감정’까지 정면충돌한다.

2004년 4월에 당시 정립회관 관장이 정년을 2개월 앞두고 관장의 임기를 65세 정년제에서 3년 임기제로 규정을 바꾼다. 그러자 1년 전부터 임금과 단체협약 문제로 다투고 있던 서울경인사회복지노동조합 정립회관지부(이하 ‘정립노조’)는 6월에 노들야학 등과 함께 정립회관민주화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이하 ‘정립공대위’)를 구성하고 관장 연임철회,새관장 채용, 이용자 대표 이사회 참여, 노조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정립회관을 점거한다. 그러자 다른 이용자들과 비조합원들이 여기에 반발하여 양측이 물리적 충돌까지 빚는다. 이사회는 관장 연임제는 정년제보다 선진적인 제도이고, 관장 퇴임을 앞두고 규정을 바꾼 건 후임 관장의 임용조건을 미리 정해두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정립공대위는 “우리는 … 한국소아마비협회 이사회를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집단으로 규정한다”고 천명한다.15) 이제 싸움은 정립공대위와 한국소아마비협회 간의 싸움으로 번진다.

이 과정에서 정립공대위 소속 장애인들은 송영욱 이사장(한국DPI 초대회장), 이익섭 이사(당시 한국DPI 회장), 채종걸 이사(당시 한국DPI 부회장)의 사적 공간에까지 몰려가 시위를 하는 바람에 이들이 차례로 이사직에서 물러난다. 국제장애운동과 당사자주의의 주요 이론가이자 실천가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장애인 당사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건 한국DPI로서는 참을 수 없는 상심이었다. 한국DPI는 청소년 시절 정립회관을 이용했던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정립회관이소중한사람들의모임(이하 ‘정소모’)을 만들어 대응한다. 정소모는 사건의 본질을 시설민주화의 문제가 아닌 노사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관장은 개인 비리가 전혀 없고 재임 기간에 자립생활운동을 소개하는 등 한국 장애운동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같은 장애인이면서 이사들의 사적 공간까지 가서 집회를 개최하고 인신공격을 한 것을 크게 비난한다. 이로써 1990년대 초반 두 차례 정립회관 비리투쟁 때 동지였던 자들이 이제 정치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은 2005년 2월 5일 광진구청의 중재로 230여일 만에 타결된다. 합의안에는 점거 농성 해제, 적절한 시기에 관장 퇴임, 조합원 1명 해고 및 7명 정직 처분 등이 포함된다. 양측의 입장이 ‘적절하게’ 조정된 내용이다.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장애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핵심 노조원들이 해고되거나 퇴사하면서 노조가 와해되고, 정립회관 본관3층을 무료로 사용하던 노들야학과 한국DPI는 2007년 12월과 2008년 4월에 각각 퇴거당한다. 그 이후로 ‘시설민주화’ 담론이 ‘탈시설화’ 담론으로 대체되고, 장애-민중주의그룹과 시설노조의 연대투쟁도 사라진다. 무엇보다 쓰라린 것은, 문제의 관장은 약속대로 관장직을 그만두고 그 대신 한국DPI를 지지하는 이사들이 떠난 소아마비협회의 이사장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관장을 쫓아내려다 되레 그에게 법인과 시설을 통째로 넘긴 꼴이다.

전국 최대 규모의 장애인 이용 시설이 이제 장애운동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더불어 청소년 시절 정립동산을 뛰놀던 숱한 장애인들의 ‘마음 속 고향’도 사라졌다. 그 대신, 한국 장애운동은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의 단절의 역사를 목격하게 되었다.

○자립생활운동의 분화

미국의 자립생활운동 이념은 일본을 거쳐 한국에까지 소개되는데, 이때 정립회관이 중재자로 나선다. 정립회관은 1997년에 세계 최초 자립생활센터 버클리자립생활센터에 직원들을 연수 보내고, 1998년에는 일본 최초자립생활센터 휴먼케어와 공동으로 ‘한일장애인 자립생활세미나’를 개최한다. 또 2000년에는 대구, 광주, 제주, 서울 등을 돌면서 ‘한일자립생활 전국순회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또 정립회관과 휴먼케어는 ‘한일자립생활지원기금’을 공동으로 조성하는데, 이 기금으로 2000년 8월과 9월에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서울)와 우리이웃자립생활센터(광주)가 한국에서는 처음 문을 연다. 특히, 이동권 투쟁을 경험한 중증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운동에 대거 참여하면서 2004년 약20곳이던 자립생활센터가 2009년에는170곳으로 증가한다.16)

자립생활운동에서도 장애-민주주의 그룹과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 졌다. 2003년 전국 11곳 센터가 모여 한국장애인IL단체 협의회를 결성하고 그다음해에 명칭을 한국장애인자립생활협의회(이하 ‘한자협’)로 변경한다. 이 과정에서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준)이 중심이 된 장애-민중주의 그룹과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서울DPI 부설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준)가 중심이 된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이 격돌한다.

한자협의 활동 방향에 대하여, 장애-민중주의 그룹은 활동가 조직이 중심이 되어 강력한 현장 투쟁을 전개하자는 입장이었고, 장애-당자사주의 그룹은 다양한 형태의 조직이 참여하여 운동과 서비스를 병행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장애-당사자주의 성향을 가진 서울센터, 제주센터, 양천센터 등이 한자협과 결별하고 2005년에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연합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장애-민중주의 그룹의 민중투쟁노선에 비판적이었다. 2006년에 10개 센터가 추가로 한자협에서 탈퇴하여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연합회에 가입함으로써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이하 ‘한자연’)가 만들어진다. 그 뒤 지금까지 자립생활운동에서 한자연과 한자협의 경합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한자연은 권익 옹호 활동과 각종 서비스 제공의 조화를 주장하며 한자협과 별도의 연합체를 구성했으며, 이는 현장 투쟁 중심의 이동권연대와 한국DPI 간의 경쟁 구도로 인식되기도 했다.”17)

초창기 자립생활운동의 분화는 내부의 입장 차이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가 맞붙었던 이동권 투쟁과 정립회관 사건 같은 외부 요인도 많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한자협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 교육권, 민중연대, 탈시설 문제 등에, 그리고 한자연은 장애인복지법 개정, 활동보조인 및 자립생활제도화, 서비스체계개선, 자립생활모형 개발 등에 주력하고 있다.

Ⅲ. 글을 마치며 - 몇 가지 질문들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 둘 다 한국 장애운동의 소중한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건 자명하다. 장애-민중주의는 급진성, 운동성, 변혁 지향성, 헌신성을 강조하고, 당사자주의는 정체성, 자기결정권과 자기주도성, 국제연대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한국 장애운동사를 되돌아보면 이 두 흐름은 건강한 경합 관계라기보다 살벌한 적대 관계에 있는 듯하다. 물론, 지향이 다른 운동들이 하나로 통일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소아병적 적대를 지속하는 것도 소모적이다.

이 사태를 중재할 만한 유력한 세력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애-민중주의 그룹과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에 각각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과정이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이 되었으면 한다.

먼저, 장애-민중주의 그룹에게.

첫째, 장애인들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개인이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둘째, 장애-민중주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 ‘노동해방/민중해방이 되면 장애해방이 된다’는 주장을 만나게 되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민중해방된 국가들, 이를테면 구소련, 중국, 북한 장애인들의 삶의 질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 장애인들의 그것보다 높다는 증거는 있는가?

셋째,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이 정부 예산에 타협적이고 권력 지향적이라고 비판하는데,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떤가? 한국 장애운동사에서 언제나 장애-민중주의의 선봉에 섰던 단체들이 연간수억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또 장애운동이 보수적 권력은 탐하면 안 되고 진보적 권력은 탐해도 되는 건가?

그 다음, 장애-당사자주의 그룹에게.

첫째, ‘장애인 당사자주의’는 장애운동의 지도 이념인가, 아니면 조직운영 또는 투쟁의 원칙에 불과한 것인가? 주요 유형별 단체들이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앞세워 복지관 위탁에 적극적인데, 복지관은 대표적인 반-당사자주의 시설이 아닌가? 이처럼 당사자주의가 광범위하게 악용될 가능성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당사자들은 전문가들에 비해 전문성이나 책임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

둘째, 장애-당사자주의의 핵심 조직인 한국DPI는 그동안 국제연대사업을 거의 독점해 왔는데, 그것이 한국 장애운동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일부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해외사업에 들인 자원동원 대비효과를 분석 해 볼 때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제연대사업에만 치중하고 국내 투쟁 현장을 등한시한다는 한국 장애운동 일각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셋째, 장애-당사자주의자들은 울림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안정적이고 전국적인 대중조직 건설의 꿈을 지금도 꾸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주의 단체들이 노골적으로 장애운동에서 멀어지고 있고,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같은 대중조직은 한국DPI 운동 방식에 아직은 유보적인데, 그렇다면 진정한 우산조직의 건설은 어떻게 가능한가? 당사자주의 이념은 여전히 위력적이지만 그것을 실천할 조직의 실체는 흐릿한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마무리하자면, 장애-민중주의든 장애-당사자주의든 다음과 같은 고전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장애운동은, 정치체제에 대한 대표성이 무시되거나 조작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 정책과 법률 안에서 작은 이익이나마 챙기기 위해 국가활동에 체제내화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변화와 고립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정책과 실천의 장기적 변화와 장애인의 권한강화를 이끄는 의식화 활동에 집중해야 하는가?18)

[주]
1) 마이크 올리버, (윤삼호 옮김), 2006 『장애화의 정치』, 대구 DPI
2) 이익섭, 2005, “장애인 당사자주의와 장애인 인권운동: 그 배경과 철학,” <장애인 당사자주의 대토론회 자료집>, 한국장애인인권포럼•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3) 서울의 ‘대학정립단’과 ‘5-4모임’, 악산의 ‘청솔’, 대구의 ‘푸른샘’, 대전의 ‘다크호스’, 부산의 ‘디딤돌’과 ‘청애회’, 춘천의 ‘예맥’ 등이 초창기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에 참여하였다.
4) 최옥란 열사, 김대성 한국 DPI 사무총장, 이안중 한국 DPI 이사, 김병태 전 민주노동당 장애인위원장, 신용호 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 위문숙 서울 DPI 회장, 이석구 한국장애인재단 사무총장, 김동호 전 보건복지부 장애인권익지원과장, 유영호 강북참세상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박춘우 한국장애인개발원 경영본부장, 손복목 전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처장, 이상호 서울시의원, 나은화 전 서울시의원(이상 무순) 등이 울림터 출신이다.
5) 가령, “한국 사회운동과 장애자운동”(정태호, 1987년 4호), “한국장애자운동론”(김동호, 1988년 6호), “장애해방이란 과연 무엇인가?”(김칠득, 1988년 7호),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장애운동과 울림터”(김한배, 1989년 8호)
6) 장애인복지신문. 1991. 4. 19.
7) 1990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정립회관 관장의 비리를 규탄하는 점거 농성이 서울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의 주도로 전개되었으며, 결국 비리 관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관장이 선임되었다.
8) 1995년 3월 8일 최정환(37세, 지체장애 1급)이 서초구청의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하자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주도하여 민중운동단체들과 함께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했다.
9) 1995년 이덕인(29세, 지체장애 6급)이 노점철거반대투쟁 기간에 인천 아암도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자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중심이 되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인천과 서울에서 거리투쟁을 전개하였다.
10) <전장협 활동기록집 ‘장애해방 그 한 길로!’> 2002, 113-114쪽
11) 당시 전장협에는 서울, 대전, 광주, 울산, 강원, 충남, 충북, 제주에 지부가 있었다. 통합 논의 초기부터 친목모임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광주지부를 제외하고 처음에는 모두 통합에 찬성하였으나 통합 과정에서 전-후임 지부장의 알력 다툼(울산지부), 회장의 투병(대전지부, 강원도 지부) 등의 이유로 지부의 절반이 통합에 참여하지 못했다.
12) 이동편의증진법은 이동권을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한다.
13) 김용욱, 2009, <장애인 야학의 전개와 학생•교사 문화: 두 야학 이야기>, 대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쪽.
14) 이동권 투쟁 과정에서 중증 장애인들이 장애운동의 ‘선봉’으로 등장한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이 운동 전체를 주도하는 지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여전히 고학력-경증-남성장애인들의 발언권이 운동 내부에 강하게 남아 있다.
15) 에이블뉴스, “정립공대위 성명서 전문”, 2004년 8월 6일
16) 윤삼호, 2010, ‘한국 자립생활운동의 현황과 과제’, <자립생활발전방안 토론회 자료집>, 한국장애인인권포럼, 7쪽.
17) 김도현, 2007, 『차별에 저항하라』, 박종철출판사, 141쪽.
18) 마이클 올리버, (윤삼호 번역), 2006, 『장애화의 정치』, 174쪽.



UP:20131022 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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