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에서는 우리들은 한센병 당사자들이 던져준 역사기술을 어떻게 받아안아 역사진단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역사진단과 더불어 「체제의 역사」를 묘사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먼저 제한을 두고자 하는 데, 지면 상의 제약 등으로 본 논문에서는 한센병 요양소의 환자작업이나 자치회활동의 역사 등의 전체상 혹은 구마모토(熊本)현 혼묘지(本妙寺) 집략이나 이와 관련된 각종 사건의 상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할 수 없다(1). 상세한 기술은 별도 보고로 하도록 하고, 이하에서는 당사자 역사기술을 받아 우리들은 어떻게 그 「역사기술」을 행하는 것인가, 그 진단을 근거로 「체제의 역사」를 그려내는 것은 어떠한 인식적 이득을 초래하는 가에 대해 간단히 기술하는 것으로 한다.
본래 구마모토에서 「한센병 문제 연구회」라는 작은 연구회를 열었었다. 한센병 당사자 수명과 당시 큐슈(九州)에 주재하고 있던 소수 연구자가 소소하게 이어가고 있던 연구회다. 1931(쇼화6)년 태어나, 1942(쇼화17)년 9월 29일 국립 한센병 요양소 기구치케이후엔(菊池恵楓園)에 입소한, 그 역구회 멤버였던 스기노 요시타케(杉野芳武)씨는 요양소에서의 「환자작업」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행해졌으며 그 자리매김이 변용해왔는 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한 이하에서는 스기노 씨가 당 연구회 보고기록을 기구치케이후엔 자치회기관지『기구치노(菊池野)』헤이세이15년 12월호에 정리한 것을 근거로 서술한다(2). 국립요양소 기구치케이후엔 환자 자치회편 『자치회의 연혁』(1956년)의 재인용도 포함해서 꽤 긴 인용이 되지만, 본장의 중요한 논점이므로 무리해서라도 실어본다.
여기에서는 기구치케이후엔의 『자치회50년사』나 『자치회의 연혁』사의 페이지이며 그것(환자작업)을 상상해보았습니다.
ここでは恵楓園の『自治会五十年史』や『自治会の沿革』史のページでそれ(患者作業)を想像してみました。
이러한 것들에 따르면, 기구치케이후엔의 개원은 메이지 42년입니다. 하지만 이미 3년후인 메이지 45년에는 「작업장려금제도」라는 것이 만들어져, 이발을 비롯해서 도로수리, 정원 단장, 재봉, 세탁, 또는 간호보조 등을 하고, 그러한 것들이 용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장려금이라는 것은 쇼화 22년 국가의 예산비목 중 「상여금」이라는 것이 계상되기 까지에는, 예를 들어 간호 보조는 의료비에서, 봉제나 세탁은 피복비에서, 또는 도로수리나 정원 단장은 영선비에서, 등등으로, 요양소 운영비에서 염출되었으므로, 속되게 말한다면 문어발식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후년 국가의 한센병 정책에서 문제가 된 이러한 환자 작업입니다만, 또는 그것의 발단이 된 것은 남겨진 기록을 보는 한에서, 주로 「경제적 면에서의 요양생활의 안정을」이라는 환자 측의 발상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입소자들은 법률제11호 「나예방에 관한 건」 제3조 「나환자로서 요양의 방도를 갖지 못하거나 또는 구호자가 없는 자들은・・・」운운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구치케이후엔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것은 주로 혼묘지 경내의, 이른바 부랑환자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지만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길거리에서 자주 불리는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 「배고픔과 추위와 빈곤함을 비교하자면 부끄럽지만 배고픔이 먼저」라는 사태는 어찌되었던 시설 안이니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빈곤하다는 면에서는 꽤 고통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기록이 있는데, 먼저 쇼화 34년 10월 25일 발행된 『자치회의 연혁』을 보고자 합니다.(원문 그대로 발췌)
(전략)큐슈(九州)요양소는 메이지 42년 4월 1일 개원되었으며, 자치회가 만들어지기 까지는 28년간의 세월이 경과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이의 환자들 사이에서의 사상이나 행동은 어떠한 것이었는 지 말해보자면, 누구라도 자포자기적 생활, 취생몽사(酔生夢死)적 생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돼지 같은 인생, 즉 먹고는 자고 일어나서는 먹는 생활을 매일같이 영위하며 보냄과 동시에, 밥이 부족하고, 용돈이 없다라고 말하고는 훌쩍 몽유자같이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치거나 열이 나거나 신경통이 도지면 저 왔습니다 라고 돌아오듯이,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오듯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격리소에서 짧게는 10일, 길게는 20일이나 30일 동안 던져진 이후 가족 기숙사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돈을 가지고 돌아온 자는 그 돈이 있을 동안에는 기관 내 일을 하지도 않고 놀면서 돌아다니는 무위한 생활을 보내면서 「너네들은 하루종일 일해서 3전이나 4전 뿐이 못 받지만, 우리들은 공터에 청소부로 나가면 매일 10엔도 20엔도 받을 수 있다. 바보같이 여기 일 따위 해봤드랬자, 세상은 굵고 짧게, 고달픈 이승은 적당히 사는 것이 현명한 인간이다.」등 태평한 이야기를 말하고는 순수하고 게다가 순진한 사람들을 붙잡고는 젖은 손으로 좁쌀 잡기(쉽게 많은 이득을 얻는 다는 뜻)같은 이야기를 하고는 소동을 부리는 것이다.(중략)
그리고 정확히 그 당시부터 구마모토 혼묘지 부근에 나병 부락이 생기고 만성적으로 걸식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출현하여 그 중 오야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하라다 히사군(原田久君)이 입소해와서 「케코미(蹴込み, 계단의 발판과 발판 사이의 수직부분)」장사를 선전하여 도망가고자 하는 분위기가 더욱 벌판의 불처럼 확산되고 기관 내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멈출 수 없는 사태가 되어, 매일 탈주하는 자의 수가 늘게 되는 사태가 현저하게 되기에 이르렀다.(중략) 당국으로서는 무일푼, 빈곤자를 구조하기 까지 손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자신이 앞으로 반드시 맞닥드리게 될 운명을 발견하고 고난번뇌하는 것이 아닌, 불편하게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쫓겨나도, 신경통이나 각종의 병에 걸려 심지어 길거리에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더라도,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큐슈 요양소에서 살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살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각자 모두 돈은 전혀 없어서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할 때에는 각자의 세계에 몰입하여 특별히 회한이나 공허함과 같은 고통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이것은 즉 각자가 자치회를 창설하려고 결의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각자의 행목은 각자의 힘으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통감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실리적, 필요관으로 만들어진 소위가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다이쇼 15년 6월 19일 자치회 창립에 이르기 되었습니다만 여기에서 그 회칙이라는 것을 보자면, (중략) 「산업」이라는 문자가 몇 번이고 볼 수 있으며, 또는 물질적 풍족을 꾀하고…등의 문구를 보자면 이것이 과연 요양소인가 라 생각하게 될 정도입니다.
(스키노(杉野) 2010: 269-272/괄호내 보충, 인용자)
2.당사자가 말하는 역사를 파악한 이후 역사를 진단하다
이러한 당사자의 역사기술을 읽고, 어떻게 역사를 진단할 수 있을까.
한가지는 「요양소에 절대 격리된 한센병 당사자가 『환자 작업』을 강요받은 것은 인권유린도 도가 지나치다」운운하는 「시설내 강제노동설」에 입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절대격리된 한센병 당사자는 저렴한 관리・운용상황 속에서 『환자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운운하는 「시설운영보완설」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당시는 탈주、도주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센병 당사자에 『환자 작업』을 통해 약간이나마 용돈이든 뭐든 살아가는 보람을 주려는 것으로 요양소 내 격리수용을 강화하려고 하였다」라는 식의 「시설통치강화설」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 그 외에도 다양한 역사진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큐슈 요양소(현재 전국 한센병 요양소 기구치케이후엔(菊池恵楓園)에서 환자작업의 자리매김과 자치회 설립에 관한 역사기술로서는 – 전국 각 한센병 요양소에서의 환자 작업의 규정이나 자치회 설립의 역사는 각각 특유의 시대적, 제도적, 조직적 문맥이 있다-, 그 어느 것도 불충분 혹은 부정확하다. 역사진단으로서 매우 불철저하기도 하다. 그러한 것들은 당사자의 말로부터 그 어느 것도 배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한센병 당사자 사람들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해 가며 살아갔었는가, 그렇게 살아남으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가능하게 한 사회적 구조가 있었던 것인가, 그 구조는 메이지 후기부터 쇼화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근대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형성, 변용되어 왔는가, 등의 질문을 당사자의 역사기술에서 파악하고 거기에서 그 무엇도 배우려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거의 기술이지만, 이른바 당사자 역사기술이 이중화된 형태로 되어 있다. 첫번째는 『자치회의 연혁』(국립요양소 기구치케이후엔(菊池恵楓園)환자 자치회편1959)에서 제시되고 있는 1909(메이지 42)년 큐슈 요양소 설립부터 1926(다이쇼 15)년 6월 19일 자치회 창립에 이르기까지의 환자 작업에 관한 역사기술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구치노』제586호(스기노 2003)에서 스기노씨가 자신이 『자치회의 연혁』이나 『자치회50년사』의 역사기술을 바탕으로 당시의 「환자작업」에 대해서 다시 한번 그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여기에서는 편의적으로 전자를 「『연혁』역사기술」, 후자를 「스기노 역사기술」이라 이름붙이고자 한다.
그런데 그 「『연혁』역사기술」이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요양소내의 죽음보다 더한 고통스러운 빈곤함 가운데 돼지 같은 생활을 당사자 자신은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여 자치회는 창립되었다】라는 판단이다. 이러한 경제적 격차 때문에 요양소 내에 도박이나 도주를 하게 되고, 그 질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치회는 창립되었다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1959년 이미 이러한 역사인식이 당사자에게 있었다는 것을 깊게 배워야 하지만, 또한 당사자의 언어에서 배우기 때문이야말로 이러한 「역사기술의 신비로움」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확실히 요양소 안에서는 매우 가난하여 요양소를 탈주, 도망하여 「밖」으로 나가면 적어도 요양소보다는 좋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두번째로, 요양소에서 일을 하는 것 보다 「밖」에서 청소부 등을 하는 편이 훨씬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었다(좋았다)라 하여 그렇다면 요양소 내의 가난에 저항하기 위해 「밖」의 직업을 중개, 알선하는 조직을 설립하면 좋았음에 틀림없다. 왜 구태여 자치회 등이라는 조직을 설립하였던 것일까. 세번째로, 당시는 격리수용을 제도적, 운용상의 전제로 하고 있는 이상 「직업알선, 중개조직」은 허용될 수 없으므로, 시설, 설치, 운영이 허용되는 조직체인 「자치회」라는 형태가 되었다 하더라도, 원래, 왜 자치회가 「산업」이나 「물질적」풍부를 창출하는 조직으로 기대되었던 것일까. 문장을 읽어 보는 한에서는 당시 한센병 당사자에게 「자치회」란 단지 환자의 상호지원, 상호부조 등 애매한 조직체가 아닌, 오히려 차별과 빈곤 한복판에서도 당사자들의 생산, 산업, 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왜일까. 그리고 원래 왜 「자치회=생산, 산업, 경영의 복합조직체」야말로 「우리들의 행복은 우리들의 힘으로 창조」하는 조직으로서 인식되었던 것일까. 예를 들어 당사자 역사기술에는 이러한 몇 가지 불가사의한 역사기술이 써져 있으므로, 우리들은 먼저 이러한 불가사의함을 통해 당사자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스기노 역사기술」은 요약하자면 【요양소 내의 빈곤함을 어떻게든 하고자 한 당사자 자신의 생각과 요양소 당국의 개원후 얼마되지 않은 시기의 격리수용정책을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사고가 일치한 결과로서의 「환자작업」이며 이러한 것을 통한 생활향상을 위한다는 것으로서 자치회는 창립되었다】라는 역사적 인식이다. 실제 스기노 씨는 「그러한 [환자작업이라는] 발상을 한 것은 (중략) 기구치케이후엔에서 처음으로 환자로 수용된 혼묘지 경내의, 이른바 부랑자라 불리는 27명의 사람들부터이지 않을까」(스기노2010:273)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 속에서 자라온 지혜로서 『상호부조』라던가 『자치』라는 것으로서 매우 훌륭하였던」혼묘지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하루하루의 생업을 세워 생활을 안정시키려 했다고 쓴다(스기노 2010:273). 「당초 전혀 순수하게 『용돈을 얻기 위해』또는 『부자유하며 수입이 없는 사람들을 원조하기 위해』또한 규모가 확대된 이후에는 『위안, 안락을 포함한 문화활동 조성 등』으로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적어도 시설 측의 보완물로서 시설운영의 한 축을 도맡은 역할이 될 것이라 등등 몽상조차 하지 않았다」(스기노 2010:273). 이러한 당사자에 의한 역사인식에 철저하게 배우지 않으면 안되지만, 동시에 그 「역사기술의 불가사의함」에도 경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먼저 원래 요양소의 빈곤함을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당사자 자신의 생각과 격리수용을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요양소 당국의 사상이 왜 「환자작업」으로 「일치」하였는가. 거기에서는 「자급자족의 추구」이상의 「자치회」라는 조직으로 「정신적 사상의 향상」「안녕질서의 형성」「산업적, 조직적 개선」「물질적 풍요로움의 향상」「영제상 어쩔 수 없이 도주하는 등의 자를 위한 구휼」「도주근절」등의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번째로 왜 「부랑인이라 불린 혼묘지의 사람들」이 그러한 과제를 「자치회」라는 조직으로 해결하려고 지향했었는가. 다른 한편으로 혼묘지 집락에서의 「만성 걸식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의 「오야붕인 하라타 히사군」이 입소해와서 「케고미(蹴込み)」장사를 선전하면 왜 「도주할 생각이 더욱 벌판의 불처럼」확산되었던 것일까. 혼묘지 집락 사람들은 「케고미」장사를 선전함과 동시에 자치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일까. 반복하지만, 당사자의 역사기술에는 이러한 몇 가지 불가사의한 역사기술이 써져 있으므로, 우리들은 먼저 그러한 불가사의함을 통해 당사자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3.혼묘지 집락의 형성과 변용
그러면, 혼묘지의 환자 집락과 요양소의 관계를 매우 간단히 읽어나가면서, 메이지 시대 후반부터 전중(戦中)기까지 어떻게 한센병 당사자가 결사적으로 살아왔는가, 그렇게 살아남으려 한 것을 겨우 가능하게 한 사회적 구조는 무엇이었는가, 그 구조는 메이지 후기부터 전중기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일본사회에서 형성, 변용되어 왔는가에 대해서 고찰해 보도록 하자.
이미 주지의 사실이지만, 구마모토 현 내에 설립된 동춘(回春)병원, 대노원(待労院), 큐슈 요양소(현 기구치케이후엔) 그 어느것도 혼묘지의 환자 집락의 존재가 원점이 된다. 1895(메이지 28)년, 영국 성공회 전도사로 구마모토에 온 한나 리델은 혼묘지 참배로에서 구걸을 하는 방랑환자의 참상을 보고 회춘 병원을 설립. 1898(메이지 31)년에는 존 메리 콜이 대노원을 설립. 혼묘지 방랑환자의 참상은 리델을 통해 중앙정계나 해외까지 퍼져 이것을 계기로 1907(메이지 40)년에 법률 제11「나예방에 관한 건」이 법제화. 이 법률을 근거로 1909(메이지 42)년, 큐슈칠현 연합회의 큐슈 요양소로서 오늘날의 기구치케이후엔은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한나 리델은 1902(메이지 35)년 대일본 위생여성회의 연설에서 「아름다운 꽃 밑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 보면, 그것은 그 위에도 없는 비참한 광경으로 남, 여, 아동의 나병 환자가 기수십명도 길거리 양측에 배회하고 있었으며(중략) 어린 아동에게 인도되어, 작은 가엾은 손을 내밀며 길거리의 비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다(3).
한나 리델이 간취한 「동정을 구걸하다=비참한 광경」은 그 후 「국욕론(国辱論)」으로 이어져 가는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우리들의 역사진단으로는 「동정을 구걸하다=비참한 광경」이라는 평범한 관점은 당시 압도적인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혼묘지 집락 모습을 구마모토 일일신문 기사는 정성껏 취재하여 언급하고 있다.
한나 리델이 회충병원을 창설한 1895(메이지 28)년 당시, 길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한센병 당사자는 「가까운 모지에서 천막(간이 텐트)를 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뒤 1904(메이지 37)-1908(메이지 38)년경 일러 전쟁시에는 80여개의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환자수는 140명을 넘었었다. 「일러 전쟁 후 혼묘지 북족의 화원 지구 측에 있던 육군 마구간이 원주민에게 불하되었다 이것이 연립주택식 임대주택으로 개수되어 다수의 환자가 주거하게 되었다. 환자는 여기를 기점으로 큐슈 일대나 츄코쿠, 시코쿠 지방까지 넓혀 『케코미』나 『권선(勧進)』라 불리는 구걸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 환자 중에는 육군의 잔반을 불하받아 빈곤자에게 팔거나 잔반을 사료로 하여 돼지를 사육. 자산을 쌓아올려 자신이 임대주택을 경영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러한 임대주택의 증가로 환자도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공사립 요양소에 비하여 혼묘지 집락은 가족과 함께 저렴한 생활비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 때문에 요양소 입소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동 집락주민이었던 입소자의 증언기록)이라 한다」(구마모토 일일신문 2002년 7월 19일 조간). 덧붙여 집락에는 환자와 함께, 환자가 아닌 빈곤한 사람도 모여들었다. 쇼와 조기의 구마모토 시 조사보고는 그 이유를 「(임대주택의 주인은)이전 다른 현에서 방랑하다가 이 곳에 거주하게 된 환자 또는 그 자손으로 환자나 가난한 사람을 잘 대접하며」(중략) 월세로 1일 9전 내외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므로 빈곤자의 생계 상 가장 훌륭하게 생활할 수 있는 낙원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후 보다 철저한 역사검증을 행할 필요가 있지만 한나 리델은 동정을 구걸하는 모습에서 비참한 광경을 간취하였지만 실제로 그렇게 외국인 전도사가 「비참한 광경」을 지극히 간단하게 간취해 버릴 정도로 「동정을 불러일으킬 기술」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시대라도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기를 부리더라도, 또 갑자기 몸가짐을 바꾸는 것을 포함해서, 속임수로 하는 구걸은 존재하였던 것이다. 「밥을 때우는 방식은 걸식 존재의 지혜이며 기법이었다. 『걸식의 제1의 방법은 받는 방법이다. 받는 방법에는 능숙하거나 서투른 방법이 있다. 신사나 숙녀분에게 몸이 불편한 장님이니 부디 동정을, 하면서 숨이 끊어질 듯 울듯이 호소하거나, 장님이 자기 부인이나 아이에게 지팡이를 끌게 하면서 시내를 배회하는 것은 보통 있는 것이다.』소매를 잡아당기면서 하는 구걸에는 능통했다」(아오키 2011:53)
아오키가 다이쇼 히로시마 현 걸식 생활세계를 그려낸 바와 같이, 걸식의 다수는 노동시장의 변화와 경제구조의 변화로 실업된 사람들이었지만, 그 외에도 신체/정신장애인, 하센병이나 매독 등 「노동불능자」도 적지 않았다(아오키 2011:41). 걸식자는 생활 양식을 잃더라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걸식자는 살아가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양식을 얻었다. 폐지, 넝마, 금붙이, 과일껍질 등을 줍고, 거머리, 민물고기, 빗자루, 풍차등을 팔고 갑자기 광대, 승려, 순례자가 되고, 도박으로 벌고, 도둑질을 하고 매춘을 한다. 대놓고 하는 구걸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 외 장례식에서 뒤섞이어 술 안주를 먹는 자, 묘지 공물을 가지고 가는 자도 있었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의 옷 먼지를 털어주고 삯을 조르는 사람도 있었다. 걸식자는 지혜와 담력으로 생명을 부지할 방법을 골랐다」(아오키 2011:43/일부 할애). 걸식자는 도박, 도둑질, 매춘, 구걸 방법으로 또는 「도시잡업」(스미야 1967:63)의 방법으로 생명을 부지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회적 구조가 존재했던 것이다(4).
혼묘지 당사자들은 「케코미」나 「권선」과 같은 구걸행각을 하며 살아갔으며, 일자리가 있다면 청소부, 잡용계, 인부, 심부름꾼 등 잡역을 하였을 것이며, 폐지, 넝마, 금붙이, 과일껍질 등을 줍기도 하였을 것이다. 육군으로부터 나오는 잔반을 불하하여 빈곤한 사람에게 판매도 하였을 것이며, 양돈, 양계도 하였을 것이다. 자산을 깧아올려 환자를 집에 들여놓거나 「가족과 함께 저렴한 생활비로 자유롭게 살아가는」「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도 포함해서「최상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낙원」이었다. 우리들이 놀라야 하는 것은 적어도 메이지 후반부터 전중기에 걸쳐 이러한 걸식노동이나 도시잡업노동으로 환자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걸식집락」「환자집락」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던 정치경제구조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4.혼묘지 집락의 자치조직화
따라서 『자치회의 연혁』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큐슈 요양소의 한센병 당사자의 생활이 「먹고는 자고, 일어나서는 먹는 생활을 매일 계속 무위하게 보냄과 동시에, 밥이 부족하고, 용돈이 없다고 말하고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 홀연히 몽유병환자처럼 탈주도망하는」것과 같은「돼지와 같은 인생」이 돼버린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단지 「격리수용」의 강제, 억압 때문에 탈주 도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닌, 적지 않은 한센병 당사자가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 그것은 적어도 요양소의 「작업장려금 제도」 하에서의 환자 작업보다 훨씬 높은 돈벌이가 될 수 있었다는 것, 또는 혼묘지에 환자를 중심으로 한 집락을 자신들이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말로, 탈주, 도망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센병 당사자는 높은 돈벌이를 위해 탈주, 도망했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걸식의 이코노미에 참여하기 위해 되돌아왔던 것이다. 뜻을 품고 무엇인가 해야지라면서 기식하는 것이 「고등걸식」이라 한다면 혼묘지 집락 집단은 실제로「고등걸식」이었던 것이다. 요양소로서는 「요양소 내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고 멈추지 못하는 사태가 되어 매일 탈주, 도망하는 자가 들어나는 상태」였을지 모르지만, 걸식의 이코노키에서 보자면 탈주, 도망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1910-20년 큐슈 요양소에 이러한 「혼란 상태」가 있다 하더라도, 무엇 때문에 자치회를 설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다시 혼묘지 집락의 역사로 되돌아가보자.
서술한 바대로, 혼묘지 집락은 이미 환자를 중심으로 한 「걸식집락」「빈자집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으로 독자의 상업이 이루어졌으며 집락 전체는 하나의 생활 집합체임과 동시에, 독립된 생산, 산업, 경영의 복합조직이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1935(쇼화 10)년 경 혼묘지 남측의 시마사키 지구의 집락을 본부로 「상애호조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주변에 있던 세 개의 집락에 있던 환자 2/3가 회원이 되었다. 회장 나카무라 리토지(中村理登治)는 양다리가 모두 병으로 의족이었는데, 1927(쇼와2)년에 큐슈 요양소에서 도망한 기록이 있으므로 - 1927년은 큐슈 요양소에서 자치회가 설립된 다음해에 해당한다 - , 아마 큐슈 요양소를 나와 혼묘지 집락에서 상애갱생회를 결성했던 것이었던 것이다.
상애갱생회에서는 봄과 가을, 두번 당시 일본에 병합되어 있던 조선반도까지 포함한 전국을 돌며 기부금을 모았다. 「케코미」나 「권선」이라 불리는 구걸의 여행이 아닌, 취의서나 영수증을 만들어 구마모토 현에 기부금 모집 허가신청도 행하였던 것이다. 기부금은 그것을 모은 본인이 혼자 독점하는 것이 아닌, 생계를 구할 길이 없는 중증자의 생활비에도 충당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집락의 미래에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다(구마모토 일일신문 2000년 7월 20일 조간).
실제 기구치케이후엔에 상애갱생회 임원이 살고 있었던 집락의 지도가 남아 있으며 – 날짜는 1936년 10월이라 기록되어 있다 – 거기에는 임원의 집이 나란히 서 있다 – 그림의 가운데에 「가것ㄹ요양소 예정지」「참배당 예정지」라 큰 점선으로 빈 곤을 둘러 싸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집락 내에 한센병 전문병원을 만들고, 가족과 함께 환자가 살 수 있도록 하는 환자자치회에 의한 「자유요양소」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구마모토 일일신문 2002년 7월 22일 조간).
히로가와(廣川)가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바와 같이 1907(메이지 40)년의 「나 예방에 관한 건」의 법적 모순 때문에 고향에 자리잡을 곳이 없던 환자가 집주하는 「유노사와(湯之沢) 집락」이 창출, 확대화되어 가지만 – 그것은 「자유요양지」라 불리울 수 있었다 - , 그 가운데 「성 발나바미션」이라는 『시립요양소』의 구조에 포함되지 않는 운동체에 의한 구료활동이 유노사와 부락의 세이프티 넷으로 기능하고 한센병자에 의료와 자립적 생활환경을 제공했다. 성 발나바미션은 국가에 본래 요구되어야 할 『무능력환자』로 전략하기 직전의 환자의 구료의 역할을 맡았다. 거기에서의 요양형태로는 각종의 제약이 있었으며, 경영자와 환자간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사회사업이라 부를만한 것도 없었지만, 유노사와 부락에서의 요양생활을 『자산력있는 환자』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 보다 많은 수의 한센병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히로가와2011:296). 물론 혼묘지 집락의 경우에는 유노사와 부락과는 역사적 경위나 슈모나 운영방침 등에서 상이하지만, 어찌되었던 1907(메이지 40)년 법의 법적 모순을 배경으로 또 메이지 후기부터 쇼화초기의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의 형성으로 적지 않은 한센병환자는 혼묘지 집락에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겨우겨우 가능했던 것이다. 집락의 사람들의 노동현황이나 경제현황이 안정하게 됨에 따라 상애갱생회가 결정되고, 이것에서 자유요양소를 구상하는 상상력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1926(다이쇼 15)년에 걸셩된 큐슈 요양소의 환자자치회란 가족과 함께 저렴한 생활비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낙원」이라 할 만한 혼묘지 집락의 자치를 옆눈으로 보면서 결성된 「매우 늦은 조직화」였던 것이다. 또는 혼묘지 집락의 편이 압도적으로 자유롭게 풍부했었던 것이므로 자치회 설립을 계기로 「혼묘지 집락의 자치기능」을 큐슈 요양소에 들고 들어와 그로 인해 생산, 산업, 경영을 전개하려고 한 실험이었던 것일 것이다. 어폐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가난함 끝에 요양소 환자에 의한 자치조직화의 재탕」이라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반복하지만 큐슈 요양소의 자치회 설치는 이러한 혼묘지 집락의 조직체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혼묘지 집락의 소멸
상세한 기술은 다른 원고를 통해 기술할 것이지만, 그 후 혼묘지 집락은 어떻게 하여 소멸하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만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1937(쇼와 12) 년경, 상애갱생회는 큐슈 구나협회 외에 자유요양소 구상에 협력해 달라고 의뢰하였다. 이에 찬동하는 측도 있었지만, 큐슈 요양소 소장인 미야자마 마츠키(宮崎松記)는 「혼묘지 주변을 살기 좋은 장소로 하는 것은 모처럼의 격리요양, 전염예방 취지가 무색해 질 것이다」라 강하게 반대. 구마모토 시 방면위원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반대. 또 상애갱생회의 기부금모집에 대한 현의 허가도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생활보호를 담당하는 방면위원이 반대의 입장이 있는 등 상애갱생회회장인 나마무라 리토지(中村理登治)을 대표로 하는 32명이 생활구호(생활보호) 신청을 하는 것도 인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상애갱생회는 「군량의 퇴로를 막는」것과 같은 형태로 점차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구마모토 일일신문 2002년 7월 23일 조간).
이렇게 궁지에 물린 상애갱생회는 1939(쇼와 14)년경에 구마모토 현 지사의 인감을 위조하고 공인이라 속여 기부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지사를 막 퇴임한 후지오카 나가카즈(藤岡長和)의 자책을 우연히 상애갱생회원이 기부를 위해 방문했다. 후지오카는 자신의 인감이 찍혀 있는 증명서를 보고는 「이런 것에 도장찍은 기억이 없다」면서 격로. 현청에 체포를 요청했다 한다. 이리하여 기부활동은 자신의 목을 조인 격이 되었다. 회원들은 차례차례 경찰에 검거되고 상애갱생회는 「범죄자집단」이라는 레테르가 붙여졌다. 이렇게 사방팔방이 막힌 채 1940(쇼와 15)년 후생성이 각도도부현에 「나병없는 현 운동」의 철저 통지. 같은 해, 구마모토 현 경찰부장으로 야마다 쥰스케(山田俊介)가 취임하여 1940(쇼와 15)년 7월 6일, 그 「혼묘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뒤의 경위에 대해서는 나중에 모두 할애하겠지만, 혼묘지 집락은 이리하여 소멸했던 것이다(5).
6.전시동원체제/전시복지국가화체제에서의 걸식노동, 도시잡업
노동의 변용
지금까지 우리들은 겨우 모두에서 서술한 당사자에 의한 한센병 요양소의 환자 작업과 자치회 설립에 관한 역사기술을 받아 이를 바탕으로 역사진단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제2절에서는 「『연혁』역사기술」에서의「불가사의함」을 받아, 우리들은 이하와 같이 질문했지만각각에 대한 답변을 해나가도록 하자.
첫째로, 【Q1】요양소에서 매우 빈곤하였으며 요양소를 탈주, 도망하여 「밖」으로 나가면 조금이라도 요양소보다는 좋게 되었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왜 였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A1】적어도 메이지 후기부터 쇼와 초기까지의 일본 도시에는 약간이지만, 각종의 걸식 노동이나 도시잡업노동으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정치경제적 구조가 있었으며, 이것이야 말로, 밖에서 일하면 조금이라도 낫다라 생각할 수 있었던 당사자의 리얼리티를 형성하였던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두번째로,【Q2】요양소내의 빈곤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밖」의 직업을 알선, 중개하는 조직을 설립하는 것이 아닌, 왜 자치회라는 조직을 설립하였을까 라는 질문에는 【A2】당시 이미 혼묘지
집락은 생활의 집합체임과 동시에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을 중심으로 한 생산, 경영, 산업의 자치조직이었기 때문에 요양소에서는 「한걸음 늦은 조직화」로서 자치회를 조직했다. 이른바 큐슈 요양소의 자치회와는 혼묘지 집락의 자치를 참조하면서 설계된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것이 아닌 「자치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로, 【Q3】원래 왜 자치회가 「산업」이나 「물질적 풍요로움」을 창출하는 조직으로서 기대되었는가. 왜 「자치회=생산, 산업, 경영의 복합조직체」야말로 「우리들의 행복은 우리들의 힘으로 창조」하는 조직으로서 인식되었을까라는 질문에는 【A3】혼묘지 집락에서 보자면, 자치란 먼저 우리들이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자치회란 「산업」이나 「물질적 풍요로움」을 창출하는 조직으로서 기대되었던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자치란 환자 동료의 상호지원 등과 같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법적 모순과 사회적, 경제적 격차의 사태에 직면해서도 생존하는 것이 가능한 생산, 산업, 경영의 복합조직체이며, 이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구상된 「자유요양지」를 지향하는 사업체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회칙에 「우리들의 행복은 우리들의 힘으로 창조」하는 조직체라 쓰여져 있던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기노 역사기술」에서는 아래와 같이 묻고 있지만 각각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Q4】원래 왜 요양소의 빈곤함을 어떻게 하고 싶어했던 당사자 자신의 생각과 격리수용을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요양소 당국의 생각이 「환자작업」으로 「일치」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A4】반복하지만 혼묘지 집락에서는 법적 모순과 사회적, 경제적 격차의 사태에 직면해서도 생존할 수 있었지만, 요양소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한발 늦은 조직화」로서 보다 좋은 「환자작업」을 제도화해 나갈 필요가 있었으며, 특히 환자가 자신들이 먹고 살아가고, 운영, 경영해 나가는 형태가 바람직했다. 다른 한편으로 「밖」의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으로 많은 용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 요양소의 탈주, 도망의 원인이었으므로, 환자작업이라는 형태로 노동을 자기조달하는 것은 확실히 안정적 운영을 초래한다. 이러한 양자의 이해가 일치하는 형태로 「환자작업」은 확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번째로,【Q5】혼묘지 집락의 「고등걸식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의 「우두머리인 하라다 히사기미(原田久君) 」가 입소해와서, 「케고미」장사를 선전하였더니 왜 「도주하려는 생각이 생겨서 벌판의 불처럼」확산되었던 것일까. 혼묘지 집락의 사람들은 「케고미」장사를 선전함과 동시에 자치회를 만들려고 했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는 【A5】「게고미」나「권선」등의 걸식 노동으로 당사자는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혼묘지 집락의 「우두머리 하라다 히사기미」가 「게고미」장사를 선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도망가려는 생각이 생겨서 들판의 불처럼」번져나갔던 것은 역시 그 걸식노동이나 도시잡업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생업의 자유를 감수하였기 때문이며, 또는 「걸식집락」인 혼묘지 집락의 자유공간을 감수하였기 대문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이란 자치와 대립하기는커녕, 당사자의 자치를 구성하는 경제적 혹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환언하자면, 자치란 자신들의 생존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어느덧 지면이 다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왜 1940(쇼와15)년 혼묘지 사건으로 혼묘지 집락은 소멸될 수 밖에 없었는 지를 묻지 않으면 안된다 – 물론, 이에 관한 역사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디까지 시행적 논고만을 하고 다시 기회를 잡아 고찰하는 것으로 한다 - .
가장 규범적인 해답은 【전체체제화에서 혼묘지 집락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속의 강화는 부정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 전시체제화에서는 자유요양소를 구상하기 까지 자치가 가능하게 되었던 생활집합체 또는 생산, 산업, 경영 복합사업체였던 혼묘지 집락을 가만둘 수 없었던 것일까. 집락에 다수의 환자가 너무 모여 있었으며, 경찰이나 방면위원 등에게는 눈꼴사나운 광경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만 내버려 두어도 그다지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자치」조직인 상애갱생회가 사상통제, 조직통제에 걸렸기 때문이라고는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물론 큐슈 요양소의 면목이 서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체면이 서지 않았던 것은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동원체제/전시복지국가체제기에서는 혼묘지 집락을 무엇 때문에 그대로 놔두지 않았던 것일까. 통제의 강화나 군사권력, 경찰권력의 비대화라는 「그럴듯한 이유」외에, 전시동원체제/전시복지국가체제에서의 걸식노동, 도시잡업노동자체가 실제로 정치경제구상의 변용과 함께 현저하게 쇠퇴해 감으로서 이른바 혼묘지 집락의 사람들의 생존이 곤란하게 된 것, 이 때문에 이른바 「눈에 띄는 환자」가 증대한 것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야마노우치(山之内)는, 총력전체제는 근대사회가 스스로의 내부에서 껴안고 있는 분쟁이나 배제의모멘트에 개입하여 「전국민을 국민공동체의 운명적 일체성이라는 슬로건 밑으로 통합하려고 하는 실험이었다」. 총력전체제란 「사회적 분쟁이나 사회적 배제(=근대적 신분제)의 제 모멘트를 제거하고 사회총체를 전쟁수행을 위한 기능성이라는 일점을 향하여 합리화하는 것이었다」(야마노우치 1995:12)라 말한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1938(쇼와13)년 국가총동원법에 이어 노동력 동원체제도 정비되었다. 또 1940(쇼와15)년 노무동원실시계획에서는 각지역간 이주는 정부관료 등의 엄중한 통제와 관리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국가총동원법이나 노무동원실시계획등은 직접적으로 혼묘지 집락의 구걸 노동, 도시잡업노동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니지만 – 원래 국가총동원법이나 노무동원실시계획등의 외부에 위치하는 노동이다, 그러한 사회정책으로 주변 노동시장은 눈에 띄게 축소화, 세분화되고 도시잡업노동이 엄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노동 총동원화와 더불어 노동자의 소득은 매우 불안정화되었기 때문에 그 「덤으로 얻는 국물」은 매우 감소하고 구걸 노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6).
실제, 혼묘지 집락에 계속적으로 발을 옮기고 상애갱생회장인 나마무라리토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시오타디 소이치로(潮谷総一郎)는 혼묘지 사건 전 강제수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가에 의한 강제수용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일반사회에서도 통제가 진척되는 전시체제 속에서 혼묘지 집락은 막다른 상황」에 있었으며 「당시 요양소에 있었던 분들에게 충분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구마모토 일일신문2002년 8월 2일 조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전시동원체제/전시복지국가체제에 있어어야 말로, 혼묘지집락의 구걸노동, 도시잡업노동은 현저하게 곤궁해졌으며, 그 때문에 환자들은 눈에 띄게 생존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빈곤한 빈자로 전락해 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행동이야 말로 사회통제가 강화되어 가는 가운데 관리, 수용의 대상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6.창조적인 역사를 이끄는 방식
정말 마지막 부분의 기술이 될 것이다.
니체의 「생에 대한 역사의 효용와 해악에 대해 Vom Nutzen und Nachtheil der Historie fur das Leben」는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에 대해」라는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문장은 오독되고 있던지 원래의 의미대로 제대로 독해되고 있지 않다(Nietzsche 1873-73=1993).
니체는 헤겔적인 역사인식을 완전히 바보취급했었다.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해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니체에게는 스스로의 생을 긍정하기 위해 과거를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고투하면서 해방하는 자들을 위해 역사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란 강렬한 비판을 통해 깊은 고충과 애착, 동경과 희망으로 분열된 인간의 역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야 말로, 단순한 사건의 집적으로서의 역사나 교과서적인 역할로서의 역사를 넘어, 역사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센 국가에 길들여진 헤겔적인 역사인식은 이러한 역사의 창조를, 더 나아가서는 거기에 새겨진 깊은 고충과 갈등, 동경과 희망으로 갈려진 역사의 압도적인 힘을 말살하고 있다고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살아남겨진 역사를 과거의 사실에 관한 지식의 집적으로 비하해버렸다. 즉, 역사학은 지식의 집적을 거쳐 과거의 문화의 사체해부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듯이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말씀을 높이 쳐들고. 그것을 계속 치켜들어 왔다. 대학교육의 장에서 미래에 대한 동경을 안는 자들에게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줄지워 세우고, 그 역사적 귀결=이야기를 읊조리게 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지 않는 동물은 「순간이라는 항으로 이어져 있는」상태이며 과거와ㅢ 관계로부터 현재를 의식하는 것 없이 현재라는 순간을 오직 살아가고 있다.이에 반해 과거의 기억을 가지는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되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인간에게는 「과거의 것이 망각되지 않으면 안되는 경계를 획정하는(die Grenze zu bestimmen, an der das Vergangene vergessen werden mus)」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Nietzsche 1873-73=1993). 경계획정이야 말로 생의 주체에 「과거의 것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변형하는 힘」을 부여하여 「과거의 것을 생에 유용한 것으로 발생한 것에서, 다시 역사 (Geschichte)를 만드는 힘」이 된다. 환언하자면 문자 그대로 몸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과 함께, 강인한 정신으로 역사를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망각해서는 안되는 과거와의 경계획정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를 형성시켜 가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강인한 정신으로 하는 비판적 역사진단을 통해 역사는 (깊은 슬픔과 함께)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역사진단, 역사기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어떤 역사는 「학원에서 쉬고 있는 해이해진 놈들」에 의해 만들어져 온 노예근성 그대로의 이야기로서 「만들어져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를 들어 「당사자 관점에서 역사를 그린다」「당사자에 존거를 둔 현실을 그린다」라는 말씀이 아니다. 반복하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당사자 이야기」는 이미 인플레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따라서 우리들은 「학원에서 쉬고 있는 해이해진 놈들」이 필요하다는 것과는 별도의 방식으로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소수파」의 관점으로 한정된 역사진단과 현실기술은 꽤 간단히 만들어진 이야기에 포헙되어 간다. 역으로 「소수파에 대한 위치잡기」는 항상 위험함을 껴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오히려 「소수파」라 불리는 사람들의 차이나 이해 등을 해명하는 편이 좋다. 더 나아가 「소수파」가 다양한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져 온 것을 인지한 후, 창조적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주]
(1)전후 일본에서의 한센병자 요양소에서 당사자들이 환자 작업을 포함한 원내 생활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 그러한 것으로 무엇을 달성해 나갈 것인가 에 대해서는 아리조노(有薗, 2011)이 자세하다. 또 전전 한센병 요양소에서의 환자 작업제도, 상애상조제도, 기관지의 위치에 대한 훌륭한 논문으로서 사카타(坂田, 2007), 요양소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으며 직공으로 살아온 현실을 그려낸 논고로서 사카타(坂田, 2010)이 참고가 된다. 쿠와바타(桑畑 2011)에 의한 오키나와 한센병 요양소에서의 퇴소자 의료이용실천도 참고가 된다.
(2)그 뒤 키쿠치노에 게재된 글은 스기노(2010), 『』その後、菊池野に掲載された文章は杉野(2010)『연리지(連理の枝) 나날을 묶어서』에 재록되었다.
(3)이 유명한 연설기록은 복수의 문헌에 소개되어 있다. 구마모토 일일신문사편(2004) 외 참조.
(4)나카카와 기요시(中川清)는 메이지기에는 잡업형, 일꾼형 노동이었지만 다이쇼기에 들어가면 점차 공업형, 일용직 일꾼형으로 이행했다고 논한다(나카카와 1985:347).
(5)혼묘지 사건 이후 회장인 나카무라 리토치 외 상애갱생회 임원 다수가 「쿠사츠 이송(草津送り)」되지만, 1942년에는 나카무라가 탈주. 그 후 기구치케이후엔으로 일시 입소하지만 곧 탈주. 이후 「사할린」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세에 대해서는 구마모토 일일신문편(2004)외 참조.
(6)여기에서는 전시동원체제/전시복지국가체제에 대해서도 또 전전과 전후의 역사적, 시대적 역사성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없다. 다카오카(高岡)는 총력 전체제기, 전시동원체제기에서이ㅡ 의료를 포함한 전시사회정책을 전전, 전후의 복지국가화 프로세스의 관점에서 고찰한다(다카오카2006, 2008a, 2008b). 전전 전후의 복지국가화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해서는 아마다(2011), 아마다, 기타무라(北村), 홋타(堀田), (2011)을 참조하기 바란다. 「마이너리티」라 불리는 사람들의 착종하는 현실과 현상에 대해 기술한 아마다, 무라카미, 야마모토 편(2012)도 함께 참조하길 바란다.
[문헌]
青木秀男,2011,「排除する近代──大正期広島の乞食世界」青木秀男編『ホームレス・スタディーズ──排除と包摂のリアリティ』ミネルヴァ書房: 33-62.
天田城介,2011,『老い衰えゆくことの発見』角川学芸出版.
天田城介・北村健太郎・堀田義太郎,2011,『老いを治める──老いをめぐる政策と歴史』生活書院.
天田城介・村上潔・山本崇記,2012,『差異の繋争点──差別を読み解く』ハーベスト社.
有薗真代,2012,「病者の生に宿るリズム──ハンセン病患者運動の「多面性」に分け入るために」,天田城介・村上潔・山本崇記編『差異の繋争点──差別を読み解く』ハーベスト社: 5-28.
廣川和花,2011,『近代日本のハンセン病問題と地域社会』大阪大学出版会.
熊本日日新聞社編,2004,『検証 ハンセン病史』河出書房新社.
桑畑洋一郎,2011,「ハンセン病療養所退所者の医療利用実践──沖縄の療養所退所者を事例として」『保健医療社会学論集』21(2): 91-103.
国立療養所菊池恵楓園患者自治会編,1959,『自治会の沿革』.
国立療養所菊池恵楓園患者自治会編,1976,『自治会50年史』.
中川清,1985,『日本の都市下層』勁草書房.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73, Unzeitgemaesse Betrachtungen II: Vom Nutzen und Nachtheil der Historie fur das Leben text.(=1993,小倉志祥訳『反時代的考察 第ニ篇──生に対する歴史の利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
坂田勝彦,2007,「〈隔離〉を構成する装置とまなざし──戦前期ハンセン病療養所における『作業』制度・『相愛互助』理念・機関誌の位置」『社会学ジャーナル』第32号.
────,2010,「ハンセン病療養所で生きることのアクチュアリティ──ある『職工』の生活史に見る生業と自己」藤村正之編『医療における排除の多層性(差別と排除の〔いま〕第4巻)』明石書房: 174-199.
杉野芳武,2003,「恵楓園における患者作業のルーツ」,菊池恵楓園入所者自治会編集委員会編,2003年,『菊池野』第586号(2003年12月号): 11-15.
杉野かおる(芳武),2010,『連理の枝──日々を綴りて』熊本日日新聞社.
隅谷三喜男,1967,『日本の労働問題』東京大学出版会.
高岡裕之,2006,「戦時動員と福祉国家」倉沢愛子・杉原達・成田龍一・テッサ・モーリス・スズキ・油井大三郎・吉田裕『岩波講座 アジア・太平洋戦争3 動員・抵抗・翼賛』岩波書店: 121-150.
────,2008a,「戦時期日本の人口政策と農業政策」『関西学院史学』第35号: 1-22.
────,2008b,「日本近現代史研究の現在──「社会」史の次元から考える」『歴史評論』第693号: 65-81.
山之内靖,1995,「方法論序説──総力戦とシステム統合」,山之内靖・成田龍一・J.ヴィクター・コシュマン編『総力戦と現代化』(パルマケイア叢書)柏書房.